[살며 사랑하며-김희성] 공생

입력 2013-07-04 19:04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진 속의 고양이는 건드리면 부스러질 것같이 말라붙어 있었다. 버려진 박제인형 같은 그 모습에는 살아 있었다는 흔적조차 보이지 않지만, 숨도 쉬고 물도 먹고 밥도 먹으며 살고 있던 하나의 생명체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을까. 대체 누가, 왜 그랬을까.

요 며칠 누리꾼들의 공분을 샀던 서울 압구정의 한 아파트 단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길고양이 생매장 사건. 아파트 지하실을 봉쇄하여 그 안에 있는 고양이들을 생으로 말려 죽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냄새나고 더럽고 무서워서. 단지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살리러 가는 구조의 발길도 가로막고 생목숨을 빼앗고 있다는 것이다. 미처 나오지 못한 새끼 고양이들의 공포에 질린 울음소리와 그 소리에 애가 닳아 목이 쉬도록 울어대는 어미 고양이의 모습.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자기 손에 피 안 묻히겠다고, 살려고 몸부림치는 작은 생명들을 물 한 모금 못 먹게 가둬두고 죽기를 기다리는 냉혹하고 비겁한 마음들. 섬뜩했다.

돌아가신 옆집 할머니 생각이 났다. 텃밭을 파헤쳐 화장실로 쓰고 평상에 널어놓은 생선까지 날름 물어가는 고양이에게 육두문자와 신발짝을 날리곤 하셨던 할머니. 어느 날 할머니가 아끼시는 장독대 큰독의 뚜껑이 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범인은 길고양이와 영역싸움을 벌인 우리 고양이였다. 납작 엎드려 빌며 변상을 해드리겠다는 우리에게 할머니는 한사코 거절하며 말씀하셨다. “짐승이 저 사는 대로 살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사람이 그런 거 갖고 탓하고 그러면 못 쓰는 거여.” 할머니는 분명 고양이를 싫어하셨다. 그러나 ‘사는 대로 살게 하는’ 공생의 의미, 사람의 도리를 세월의 지혜로 마음에 담고 계셨다.

시끄럽고 냄새나고 불쾌할 수 있다. 그래서 싫을 수도 있다. 이해한다. 그러나 혐오의 선을 넘어 인위적으로 생명을 해하는 살상행위는 해서는 안 된다. 간디는 동물이 받는 대우로 국가의 품격과 도덕적 진보를 가늠할 수 있다 했고, 톨스토이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정의로움의 첫째 항목으로 동물학대 금지를 들었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자기보다 약한 하등동물에게 가져야 할 마음은 혐오와 배제가 아니라 책임과 공생이라는 것, 그것이 사람이 가야 할 바른 길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해하여 쾌적한 삶을 추구할 권리 같은 것은 인간의 법에도, 세상 어디에도 없다. 부디 마음을 돌려 이 무고한 살생을 멈춰주길 부탁드린다.

김희성(일본어 통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