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나루] “어! 초안과 다르네”… ‘朴 연설 싱크로율’에 웃고 운다
입력 2013-07-05 05:04
한 청와대 비서관은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행사에서 발언해야 할 연설문 초안을 작성했다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행사장에서 초안을 꺼내놓고 경청하는데 대통령이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발언을 이어갔기 때문이다. ‘보고가 잘못 올라갔나’라는 걱정부터 해서 온갖 생각을 하던 도중 연설에 초안과 일치하는 ‘흔적’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머쓱하게 초안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박 대통령이 연설문 초안을 그렇게 많이 고치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대통령의 발언은 곧 그 자체가 정책이 되고 정부의 의지를 상징한다.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하기도 한다. 그만큼 정교하게 준비된다. 역대 정권에서는 각 청와대 수석실, 정부 부처 등 해당 분야 전문가에 의해 만들어진 연설문 초안을 연설기록비서관이 다듬은 뒤 보고를 올렸고, 대체로 대통령은 초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연설을 했다. 대통령이 ‘깜짝 애드리브’를 하거나 아예 연설문을 직접 작성하는 경우는 있어도 박 대통령처럼 준비된 연설문을 또박또박 읽는데도 매번 초안과 다른 사례는 극히 드물었다.
의원 시절부터 직접 연설문을 꼼꼼하게 수정했던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더욱 자신의 발언 내용에 공을 들이는 모습이다. 후보 시절 붙었던 ‘연설문 초안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다’는 말은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따라다니고 있다.
중요한 연설의 경우에는 초안 단계에서 ‘반송’당할 때도 있다. 지난 5월 박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는 동안 화제가 됐던 상·하원 합동회의 영어 연설은 외교부에서 초안을 작성해 올렸지만 ‘다시 작성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외교부 차관, 북미국장 등은 다시 모여 한국에서 3대가 군인으로 근무했던 모건씨 가족을 소개하는 대목 등을 포함한 2차 초안을 만들었고 박 대통령의 최종 수정을 거쳐 연설문은 미 의회 단상에 올라 갈 수 있었다. 지난달 중국 칭화대 연설도 외교부에서 보낸 초안에 박 대통령이 자신의 국정철학을 담아 세세한 문구까지 직접 다듬었고 결과적으로 초안과 상당 부분 달라졌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청와대와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서는 ‘말씀 싱크로율’이라는 용어가 있다. 자신이 올린 연설문 초안과 실제 연설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 비율을 따져본다는 의미다. 대체로 80% 이상 반영되면 ‘대박’, 절반만 일치해도 만족하며, 20∼30%밖에 초안의 흔적을 남기지 못한 인사들은 대통령 의중 파악에 실패했다는 반성과 함께 분발을 다짐하게 된다. 박 대통령의 ‘말씀’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없는 원고를 손에 들고 실제 연설과 눈이 빠지게 비교하는 사람이 있다면 십중팔구 초안 작성자들로 보면 된다.
유성열 기자 nukuv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