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봉 시집 ‘걸레 옷을 입은 구름’ 순수와 교감하는 생태주의자의 노래

입력 2013-07-04 17:27


어떤 모임에 이은봉(60·사진) 시인이 나타나면 그 자리는 환하게 빛난다. 안경 너머 재치 있는 눈빛으로 천진하게 웃는 표정이며 그가 쏟아놓는 유머가 마치 꽃 핀 자리 같다. 그래서인지 그의 신작 시집 ‘걸레옷을 입은 구름’(실천문학사)엔 유난히 꽃을 소재로 한 시가 많다.

“농협 창고 뒤편 후미진 고샅, 웬 낯빛 뽀얀 계집애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누고 있다// 이 계집애, 더러는 샛노랗게 웃기도 한다 연초록 치맛자락 펼쳐 아랫도리 살짝 가린 채/ 왼편 둔덕 위에서는 살구꽃 꽃 진 자리, 열매들 파랗게 크고 있다”(‘민들레꽃’ 부분)

봄이면 지천으로 피어나는 민들레꽃의 푸진 생명력이 창고 뒤편 후미진 곳에 쪼그려 앉아 오줌을 누는 나이 어린 계집애와 대비되면서 한 폭의 수채화를 탄생시킨다. 시인은 이렇듯 즉흥성과 순간성의 붓을 쥐고 있는데, 그 필법은 순수와 무구에 바탕을 둔 자연 혹은 생태와의 교감에 있다.

“구름이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자꾸 나와 달 사이의 교신을 끊는다 걸레옷을 입은 구름…/ 교신이 끊기면 나는 달에 살고 있는 잠의 여신을 부르지 못한다/ 옛날 구름은 그냥 수증기, 수증기로는 나와 달 사이의 교신을 끊지 못한다/ 오늘 구름은 고름 덩어리, 걸레옷을 입은 구름은 제 뱃속 가득 납과 수은과 카드뮴을 감추고 있다”(‘걸레옷을 입은 구름’ 부분)

시인은 달과의 교신을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구름은 온갖 중금속을 내부에 감춘 채 교신을 방해한다. 이 시는 “잠들지 못하면 어떤 영혼도 바로 숨을 쉬지 못한다 그렇게 죽는다”라고 마지막 연을 장식하는데, 이는 순수와 무구의 교신을 방해하는 생태계 파괴를 고발함과 동시에 죽음에 대한 시인의 인식을 보여주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보라니까 내 몸에도 죽음이/ 덕지덕지 붙어 있잖아 죽음투성이잖아/ 어깨 위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저 살비듬 좀 봐 매일같이/ 시체를 내뱉고 있잖니 몸이라는 게/ 그렇잖니 자, 보라고”(‘살아 있는 죽음’ 부분)

각질이나 비듬처럼 우리 몸엔 이미 수많은 죽음들이 내포돼 있기에,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죽음과 삶이 반복되는 현상이라는 게 죽음에 대한 그의 인식론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을 하나의 공존체로 보는 독특한 인식론의 수확일 것이다. 이은봉은 ‘시인의 말’에 “세상에 나온 지 60년, 시단에 나온 지 30년”이라며 “순수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죽음의 벼랑에 이를 때까지 시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수밖에”라고 썼다.

정철훈 문학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