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11) 아버지 “동희야, 두 오빠 죽인 학생을 구해주거라”
입력 2013-07-04 17:28 수정 2013-07-04 16:40
순천경찰서 뒤편의 총살 현장을 많은 사람들이 목격했다. 좌익 학생들은 ‘예수 사상’을 버리고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면 살려주겠다고 했지만, 두 오빠는 끝까지 거부했다. 큰오빠는 ‘하늘 가는 밝은 길이 내 앞에 있으니…’라는 찬송가를 부르며 숨졌다. 작은오빠도 “내 신앙도 형님과 같소. 나도 쏘시오”라고 항변하다 같이 숨졌다.
이 일을 주동한 학생이 안모군이었다. 안군은 쓰러진 작은오빠를 향해 확인사살까지 했다.
반란은 불과 1주일 만에 진압됐다. 순천의 상황은 180도로 바뀌었다. 정부에선 여수·순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군 총사령관에게 모든 통치권을 주었다. 재판 없이 즉결 처분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경찰도 손이 모자라 우익 학생들의 모임인 ‘학생 연맹’에 무기를 공급해 치안권을 주었다. 학생 연맹은 순천 북국민학교에 좌익 인사들을 잡아다 ‘악질’과 ‘단순 동조자’를 분류했다. 취조와 고함, 고문 소리로 건물이 진동했다. 참혹했다. 악질로 분류되면 사형에 처해졌다. 생사여탈이 한순간에 갈렸다. 잡힌 학생들의 부모들이 몰려와 내 자식은 좌익에 가담하지 않았다며 애원했다.
두 오빠를 총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학생이 붙잡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사실 순천의 나덕환 목사님 아들인 나제민 오빠를 잡으려 했지만 허탕치자 옆집에 살던 우리 두 오빠를 잡아가 취조하고 총살했다고 자백했다. 확인사살을 한 뒤 중학교 앞 신작로에 버린 사실도 털어놓았다. 그의 목에는 ‘악질-사형’이라는 팻말이 걸려 있었다.
제민 오빠에게 그 소식을 전해들은 아버지는 조용히 나를 불렀다. “동희야.”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눈빛은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지금 부흥집회 때문에 집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순천까지 갈 수 없구나. 나 대신 네가 나덕환 목사님에게 다녀오너라. 가서 내 뜻을 전하거라.” “아버지 뜻이라니요?” “네 두 오빠를 죽인 학생이 잡혔다지? 네가 얼른 나 목사님께 가서, 그 학생에게 매 한 대도 때리지 말게 하고 사형장에서 빼내 달라고 부탁해라.”
그리고 아버지는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그 아이를 내 아들로 삼으려 한다. 이 말도 잊지 말고 전해다오.”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사실 아버지는 처음 두 오빠의 사망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두 오빠의 유품이 집에 왔을 때는 오열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애양원에 부흥회 인도차 와 있던 이인제 조사님의 말씀에 아버지가 마음을 바꾸었다고 했다.
“손 목사, 우리는 과거 감옥에서 순교하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셨소. 오늘 젊은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바친 것은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니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오히려 기뻐합시다.”
아버지는 이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한 줄기 밝은 빛이 비치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어쨌든 그 말을 전해야 할 임무를 맡은 것은 나였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이미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 마음과는 다른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말대로 할게요.” 말하는 내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어깨를 들썩이며 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내 눈물을 닦아주며 꼭 안아주시고는 말했다. “고맙다. 역시 내 딸이다. 그 학생이 사형당하기 전에 가야 하니 서두르거라.” 아버지는 부흥집회를 위해 황급히 떠났다. 나는 억지로 발길을 옮겨 순천으로 향했다. 나 목사님 댁을 찾아가 아버지 말씀을 전했다.
“과연 손 목사님이시구나.” 나 목사님은 학생들이 붙잡혀 있는 조선은행 옆 대학당으로 달려갔다. 우리 오빠를 죽인 그 학생은 이미 피투성이가 돼 있었다. 취조는 끝나지 않았다. 구타와 발길질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를 더 이상 때리지 마시오!” 나 목사님은 분노로 가득 차 있는 우익 학생들을 향해 소리쳤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