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돈 파수 은행과 비호한 정부, 그 악행 파헤친다

입력 2013-07-04 17:25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장 지글러/갈라파고스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에드랄린 마르코스(1917∼1989). 1965년 대통령이 된 그는 1986년 민중봉기로 자리에서 쫓겨날 때까지 극악무도한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줬다. 마르코스는 노동조합과 농민조직에 탄압을 일삼았으며, 자신의 뜻에 반하는 정적은 고문하거나 암살해버리곤 했다.

독재의 그늘 아래에서 필리핀 노동자들 삶은 갈수록 팍팍해졌다. 필리핀 수도 마닐라는 아시아 미성년자 성매매의 수도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아이들은 영양실조나 기아에 허덕였다. 1980년대 말 필리핀 인구 5800만명 중 약 3분의 2는 세계은행이 분류한 ‘절대빈곤’ 상태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마르코스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국가의 곳간을 자신의 금고처럼 여겼다. 나라 예산 중 수백만 달러를 매년 착복했으며, 과거 필리핀을 강점한 일본이 전쟁보상금 명목으로 지불한 수억 달러 중 일부도 챙겼다. 세계은행이나 민간 협력기구가 필리핀 빈곤층을 위해 지급한 돈도 그의 돈이었다.

마르코스가 빼돌린 장물(臟物)은 스위스 은행 40여 곳에 차곡차곡 쌓였다. 액수는 10억∼15억 달러에 달했다. 은행들은 마르코스가 빼돌린 돈이 필리핀 국민들의 돈이란 걸 모를 리 없건만 “고객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마르코스, 그리고 마르코스의 금고를 지켜주었다.

문제는 범죄에 공모하는 스위스 은행들의 행태가 만연해있다는 점이다. 스위스 은행들은 세계의 악질 독재자들 돈을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해왔다. 이들 은행은 돈세탁의 통로이기도 했다. 과거 독일의 경제 전문지 빌란츠는 이런 논평을 내놨다. “스위스는 독재자들의 보물을 숨겨둔 보물섬이다.”

외국의 독재자들이 그러하듯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재력가들이 탈세를 목적으로 국외에 재산을 은닉한 사례가 속속 드러나 충격을 줬다. 이들은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등에 유령회사를 세워 회삿돈을 빼돌리고 조세를 포탈했다. 아직 범죄 사실이 확인된 건 아니지만 전(前) 대통령의 아들을 비롯해 숱한 국내 명망가들 이름이 오르내렸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범죄를 가능케 하는 걸까. 답을 구하려면 조세 회피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스위스 은행들에서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스위스 은행들은 부자들의 부도덕한 행태가 시작된 출발점이자 현재도 은밀한 범죄가 이뤄지는 비밀의 성(城)이다.

실제로 현재 전 세계 역외 자산의 3분의 1 이상은 스위스 은행들에 있다. 이 중 합법적인 거래를 통해 입금된 돈을 뺀 나머지 돈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된다. ①마약조직 등이 범죄를 통해 거둬들인 ‘검은 돈’ ②독재자들이 착복한 부패성 자금 ③재력가들이 탈세를 목적으로 입금해놓은 돈.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스위스 은행들 특유의 비밀주의 때문이다. 스위스가 고객 정보를 보호하는 내용의 이른바 ‘은행 비밀주의’를 법제화한 건 1935년. 이후 스위스는 돈세탁의 요충지가 됐다. 가령 특정 범죄 조직이 마약 판매 등을 통해 거둬들인 돈은 알리바바의 동굴 같은 스위스 은행들에서 감쪽같이 ‘신분’을 세탁해 프랑스 파리나 미국 뉴욕의 부동산 시장, 일본 도쿄나 영국 런던의 증권거래소 등지로 흘러갔다.

스위스 출신으로 프랑스 소르본대에서 사회학 교수로 재직한 저자는 자국 은행들의 중상모략과 악행을 낱낱이 까발린다. 돈세탁의 내밀한 과정뿐만 아니라 스위스 은행들이 외국 독재자들이 착복한 돈을 끌어오려고 벌이는 작업들, 은행들이 거머쥔 막강한 파워 등을 확인할 수 있다.

1990년 프랑스 파리에서 이 책이 출간됐을 당시 저자는 살해 위협을 받는가하면 스위스 언론으로부터 ‘조국의 배신자’라는 공격까지 당했다고 한다. 실제로 그는 고국을 ‘범죄자의 안식처’ ‘유럽 한가운데 놓인 해적 떼 소굴’ ‘전 세계 검은 돈의 네트워크’ ‘탐욕으로 병든 나라’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책은 온갖 논란과 발간 이후 잇따른 소송에도 불구하고 세계 ‘검은 돈’의 뿌리를 파헤친 내용 때문에 현재까지 28개 언어로 번역·출간되는 등 세계적 호응을 이끌어내고 있다.

저자는 스위스 은행들이 범죄를 공모하고 때론 범죄에 적극 가담할 수 있기까진 스위스 정부의 그릇된 태도가 큰 몫을 했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국익이라는 명목 아래 은행들을 비호했으며, 주먹구구식으로 만든 법으로 범죄를 방조했다. 정치가들은 은행 이익에 반하는 법률은 거부했고, 판사들 역시 범법행위를 묵인하는 일이 허다했다. 스위스 은행이 저지르는 잘못 때문에 스위스 국민, 나아가 세계 곳곳의 빈민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들은 항상 스위스 은행들 편에 서 있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일까. 책은 현재의 잘못된 금융 시스템을 감시하고 바꾸려는 성숙한 시민의식이 해묵은 문제를 풀 수 있는 열쇠라고 강조한다. 유럽 국가들에 주문하는 내용이지만 한국 사회에 던지는 조언으로 읽어도 어색함이 없다.

“유럽연합을 구성하는 모든 국가는 유서 깊고 역동적인 민주국가들이다. 민주국가에서 무기력이나 불가능은 있을 수 없다. 유럽에서 시민의식의 봉기는 임박했다. 시민의식의 봉기는 스위스 은행 비밀이라는 치명적인 제도를 대번에 쓸어버릴 것이다.”(24쪽) 양영란 옮김.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