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에 더욱 수려한 제천 금수산의 용담폭포와 선녀탕
입력 2013-07-03 17:31
선녀의 날개옷이 이처럼 투명하고 아름다울까. 구름과 맞닿은 금수산 녹음 속에서 주유하던 녹수(綠水)가 선녀탕으로 불리는 상탕 중탕 하탕에서 잠시 호흡을 고른다. 이어 선녀의 피부처럼 매끄러운 암릉을 미끄러지기 시작한다. 물레로 비단실을 뽑듯 베틀로 비단천을 짜듯 용담폭포를 하얗게 수놓은 폭포수가 우레 같은 소리와 함께 짙은 녹음 속으로 스며든다.
조선시대 왕들은 피서를 어떻게 즐겼을까. 구중궁궐에 사는 왕이 한양과 멀리 떨어진 금강산이나 관동팔경으로 유람이나 피서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정조를 비롯한 조선의 왕은 도화서 화원이 그린 산수화를 누워서 감상하는 와유를 통해 눈과 마음으로 유람도 하고 피서도 즐겼다.
와유(臥遊)는 ‘누워서 노닐다’는 뜻으로 산수화 속의 자연을 보면서 유유자적하는 왕이나 사대부의 도상유람(圖上遊覽)을 말한다. 옥순봉을 비롯해 금강산과 관동팔경의 비경을 그린 단원 김홍도의 ‘병진년화첩’도 궁궐을 비울 수 없었던 정조가 와유를 즐기기 위해 어명으로 탄생시킨 작품 중 하나다.
폭포의 그림이나 사진을 벽에 걸어두고 즐기는 와유도 운치 있지만 발품을 팔아 몸소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유람에 비할 바는 아니다. 평소에는 실오라기를 걸치고 있다가 장마철 큰 비 내린 직후에 반투명 비단천으로 눈부신 나신을 살짝살짝 가리는 금수산의 용담폭포와 선녀탕은 선인들의 산수화에서나 만나는 비경.
용담폭포와 선녀탕을 품고 있는 충북 제천 수산면 금수산(1016m)의 본래 이름은 백운산이었다. 하얀 구름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산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옥순봉을 비롯해 산자수명한 제천의 산수를 호시탐탐 노리던 단양군수 퇴계 이황(1501∼1570)이 단풍이 고운 백운산의 풍경에 반해 ‘비단에 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답다’고 금수산(錦繡山)으로 개명했다고 한다.
제천과 단양의 경계에 우뚝 솟은 금수산은 멀리서 보면 산 능선이 마치 미녀가 우아하게 누워있는 모습처럼 보여 ‘미인봉’으로 불린다. 봄에는 철쭉, 여름에는 녹음, 가을에는 단풍, 겨울에는 설경이 아름다워 연중 산행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한국의 100대 명산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금수산의 주능선은 작성산(848m), 동산(896m), 말목산(720m) 등 700∼800m 높이의 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서쪽으로 뻗은 지릉에는 신선봉(845m), 미인봉(596m), 망덕봉(926m) 등 수려한 산들이 청풍호를 둘러싸고 있다. 금수산의 비경 중 으뜸으로 꼽히는 용담폭포와 선녀탕은 망덕봉 자락의 짙은 녹음 속에 꼭꼭 숨어있다.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제천은 진경산수화의 고장답게 지명도 산수화처럼 운치가 있다. 청풍호를 둘러싼 청풍면(淸風面), 얼음처럼 차가운 송계계곡이 흐르는 한수면(寒水面), 월악산 동쪽자락에 위치한 덕산면(德山面) 등이 그렇다. 수산면(水山面)도 예외는 아니어서 청풍호에 발을 담근 금수산과 옥순봉은 일찍이 이황과 김홍도를 비롯한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용담폭포로 가는 길은 수산면의 상천리 백운동마을에서 시작된다. 청풍호반을 끼고 있는 백운동마을은 산수유로 유명한 산골마을로 제천 자드락길 4코스의 종점. 봄에는 묵은 돌담을 배경으로 샛노란 산수유꽃이 골골마다 띠를 두르고, 가을에는 빨간 산수유열매가 점묘화를 그리는 마을로 지난해 충북 최초의 슬로시티로 이름을 올렸다.
‘비단 같은 절경’이라고 새긴 표지석이 동구를 지키는 백운동마을에는 10여 그루의 기이하게 생긴 노송이 터줏대감처럼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백운동마을은 마을 이름처럼 산안개가 피어오르는 이른 아침에는 한 폭의 산수화로 변신한다. 시시각각 모습을 바꾸는 산안개 사이로 금수산 자락의 능선들이 숨바꼭질을 하고 희미한 안개 속에서 들일하는 농부들은 금수산 신선처럼 마냥 한가롭다.
상천휴게소 옆으로 뻗은 백운동 마을길로 들어서면 엉성한 돌담을 배경으로 활짝 핀 접시꽃이 시골아낙처럼 수더분한 표정을 짓는다. 용담폭포 안내석은 눈이 내린 듯 망초꽃이 하얗게 핀 농로 끝에 위치하고 있다. 등산로는 이곳에서 두 갈래로 갈라진다. 왼쪽 길은 200m 거리에 위치한 용담폭포를 지나 망덕봉으로 가는 산행길이고, 오른쪽 길은 계곡을 따라 정상에 오르는 등산로이다.
한여름 물맞이 폭포로도 유명한 30m 높이의 용담폭포는 폭포 아래에서 보면 밋밋하기 그지없다. 폭포수가 흘러내리는 암릉이 배불뚝이처럼 튀어나와 10m 정도만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레 같은 소리와 함께 쏟아지는 폭포수가 5m 깊이의 소(沼)로 떨어지면서 일으키는 하얀 물보라는 심신을 청량하게 한다.
용담폭포와 선녀탕을 한눈에 조망하려면 계곡을 건너 폭포 왼쪽 뒤로 이어진 바위전망대에 올라야 한다. 암릉은 급경사 구간이라 곳곳에 철계단과 로프가 설치돼 있다. 암벽 등반하듯 10분 정도 암릉을 기어올라 바위전망대에 서면 금수산을 진동하는 용담폭포와 선녀탕이 자태를 드러낸다. 눈을 돌리면 청풍호 뒤로 월악산 영봉의 날카로운 능선이 옅은 안개 속에서 수묵화를 그린다.
용담폭포와 선녀탕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온다. 옛날 중국의 주나라 왕이 세수를 하다가 대야에 비친 폭포를 보았다. 주왕은 신하들에게 동쪽으로 가서 이 폭포를 찾아오라고 명령했는데 바로 그 폭포가 용담폭포였다고 한다. 아쉽게도 바위전망대에서는 나무에 가려 선녀탕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절벽 틈새로 난 벼랑길 끝에는 상탕 중탕 하탕을 비롯해 용담폭포가 한눈에 들어오는 포인트가 짙은 녹음 속에 숨어 있다.
주나라 왕에 얽힌 전설 때문일까, 선녀탕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거대한 암릉을 흘러내리는 폭포수는 용이 꿈틀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선녀의 옷자락이 펄럭이는 것 같은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김홍도가 무덤에서 살아온다면 꼭 그리고 싶은 진경산수화는 바로 금수산의 용담폭포와 선녀탕이 아닐까.
제천=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