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10) 두 오빠 총살됐다는 소리에 순천까지 50리 길을…

입력 2013-07-03 17:29 수정 2013-07-03 22:10


다행히 그때 아버지는 집에 없었다. 학생들은 신발을 신은 채 방으로 뛰어들어와 이 방 저 방 뒤지기 시작했다. 혹시나 어디 숨었을까 죽창으로 천장과 마루를 쑤셔댔다. 학생들은 아버지를 찾지 못하고 집을 나서면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던졌다. “오늘 당신 아들 두 놈이 다 총살당해 죽었단 말이오. 알고나 있소?” 그 말을 내뱉던 그 사람의 얼굴이 지금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어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아들들이….”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나도 정신이 아찔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아니야. 오빠들은 결코 죽었을 리가 없어.’ 나는 주변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고 순천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애양원에서 순천까지는 50리 길이다. 죽창을 든 젊은 학생들을 태운 트럭이 쌩쌩 지나갔다. 곳곳에서 반란군을 마주칠 때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수·순천에 주재하던 14연대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뒤 좌익 학생들에게 무기를 건네고 그들에게 치안을 맡긴 상황이었다. 군인들은 시내의 지리나 상황을 잘 알지 못해 학생들을 동원했던 것 같다.

가까스로 도착한 순천 시내는 눈뜨고 볼 수 없는 생지옥으로 변해 있었다. 신작로 옆으로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개들이 그 시체를 물어뜯고 있었다. 가는 곳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전봇대에는 불에 탄 채로 묶인 주검도 있었다. 경찰서와 관공서도 모두 반란군이 접수한 상황이었다.

좌익 학생들은 반동분자를 색출한다며 정치 요인, 정당 관계자, 부유층, 기독교인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어제까지 같은 학교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던 급우들이 친구의 가슴에 서슴없이 총부리를 들이댔다. 반란이 진압된 뒤 전남 보건후생국이 발표한 사망자는 3500명, 행방불명자는 500명이었다.

간신히 오빠들과 함께 생활하던 집에 도착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막상 집 앞에 오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동희야, 소풍은 재미있었니”하며 오빠가 나를 부를 것만 같았다. 고개를 내밀어 집안을 들여다보았다. 마당에 오빠들의 교복과 책, 가방과 사진, 목도리가 내팽개쳐져 있었다.

조금 있자 옆방에 살던 분이 대문 안으로 들어오셨다. “아이고, 동희야!” “집사님….” 더 이상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 동희야. 동인이하고 동신이는….” 나는 애써 정신을 수습하고 물었다. “시신은 어찌 됐나요?” “내가 찾아다가 다른 곳에 옮겨놓았다.” “어서 가 봐요.”

따가운 햇살이 내리 쬐는 산모퉁이의 밭도랑이었다. 가마니 위에 두 오빠가 누워 있었다. 머리가 터져 온 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이마와 가슴에는 총알 자국이 뻥 뚫려 있었다.

“하나님! 하나님은 그때 무얼 하고 계셨나요. 내 오빠들이 그렇게 무고하게 죽어갈 때 당신은 눈을 감고 계셨나요. 왜요! 한 사람만 데려가도 억울한데, 왜 두 사람이나 데려갔습니까. 하나님 두고 봅시다. 내가 예수를 믿는가 봐요. 이 총알은 누가 만들었나요. 날아오는 총알 막을 수는 없었나요?” 내 입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실성한 사람처럼 마구 외쳐댔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죽게 놔두셨나요. 다시 살릴 수는 없었나요.”

두 오빠가 좌익 학생들에게 끌려간 것은 21일이었다. 죄목은 기독학생회장인데다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하는 친미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순천경찰서로 끌려가면서도 오빠들은 학생들을 달래려 했다고 당시 사진관 아주머니께서 나중에 전해주셨다.

“이봐, 우리는 같은 동족이고 같은 학생 아닌가. 같은 동족끼리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뭔가. 예수 믿고 선한 일을 해야 이 나라가 복을 받지. 동족끼리 헐뜯고 싸우면 망하기밖에 더 하겠어?”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