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잃은 이 땅에 근대교육 첫발… 백년대계 주춧돌 놨다
“우리의 재래 종교는 지금 기운이 다했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에로의 개종의 길은 환히 열려 있습니다. 기독교 교사들은 우리나라 어느 구석에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개혁을 하기에 앞서 먼저 우리 백성을 교육해야 하며 기독교화해야 합니다.”
구한말 정치인 박영효는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했을 때 선교사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하며 한국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서구식 교육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를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은 고종에게 기독교와 서구 문물의 수용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개화 정책을 추진키로 한 고종은 선교사의 학교 사업과 병원 사업을 허락했다.
이렇게 시작된 기독교 학교는 민족의 필요를 채워줬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씨를 뿌린 서구식 근대교육은 구습 타파, 여권 신장 등 사회의 다양한 영역에서 변화와 개혁을 가져왔다.
선교사들은 학교 교육을 통해 기독교 이상을 실천하는 것을 중요한 선교 원칙으로 삼았다. 1885년 서울에 도착한 헨리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 달 먼저 와 있던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의 집을 사서 방 두 칸의 벽을 없애고 그곳에서 2명의 학생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의 시초다. 아펜젤러는 4∼5년 뒤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한국 중국 일본 미국인 등 82명이 입학했다. 한국 학생들은 영어 해득이 이웃 나라 학생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우리는 기독교 쪽으로 가고 있다. 처음엔 기도를 할 수도 없었지만 정기적으로 기도한 지가 벌써 2년째 됐다.”
윌리엄 스크랜턴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은 1886년 한국 최초의 사립여성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열었다. 서울 정동 스크랜턴 여사의 집 사랑방에서 단 1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다. 처음부터 상황이 좋지는 않았다. 극심한 가난 때문에 입학한 첫 재학생의 어머니는 “딸이 조만간 미국으로 끌려가 신세를 망치게 될 것”이란 주변 사람들의 억측과 비난 때문에 딸을 도로 데려가려 했다. 결국 스크랜턴 여사가 “아이를 절대로 이 나라 밖으로 데려가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서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스크랜턴 여사는 “두 번째 학생은 어린 거지였는데, 이 아이가 불행하지도 천대받지도 않는 것을 보고 다른 어머니들도 차츰 우리를 믿기 시작했다”고 회고했다.
선교사들의 사역에 대한 왕실의 기대가 커서 고종이 친히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이름을 지어줬고 명성황후도 여학교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호레이스 언더우드 선교사는 경신학교(儆新學校)를 세웠다. 1885년 고아원 형식으로 시작한 언더우드학당은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05년 경신학교로 개명되면서 학교로서의 틀을 다져갔다. 이 학교는 김규식, 안창호 등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언더우드는 1915년 조선기독교대학을 세워 한국 대학교육 발전에도 기여했다. 조선기독교대학은 연희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뀐 뒤 1957년 세브란스의과대학과 통합, 연세대학교가 됐다.
1897년 평양에선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가 숭실학교(崇實學校)를 개설했다. 이 학교는 1905년 숭실대학으로 승격해 한국 최초의 대학이 됐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1938년 폐교됐다. 해방 후 1954년 서울에서 숭실대로 재건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07년 평양대부흥 전후로 학교 설립이 급증해 1909년엔 전국에 950여개의 기독교 학교가 세워졌다. 박용규 총신대 교수는 “미션스쿨 교육의 목적은 단순한 복음 전달만이 아니라 한국인들이 더 나은 삶, 민주적인 삶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었다”고 말했다. 이상규 고신대 교수는 “한국에서 기독교 학교는 교육이 특수한 계층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것임을 일깨워줌으로써 한국사회의 변화를 주도했다”고 설명했다.
천지우 기자 mogul@kmib.co.kr
<자문해주신 분들>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 ▲박용규 총신대 신대원 교수 ▲이덕주 감리교신학대 교수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 ▲임희국 장로회신학대 교수
[한국史를 바꾼 한국교회史 20장면] ① 구한말 민족 일깨운 기독사학
입력 2013-07-03 17:21 수정 2013-07-03 1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