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교육대 불법에 항거한 생존자 민주화운동 첫 인정
입력 2013-07-02 18:13 수정 2013-07-02 23:20
1980년 7월 28일 오후,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당시 41세 이택승(74)씨는 갑자기 동네 경찰서에 끌려갔다. 이씨는 사흘 동안 보호소에 갇혀 조사를 받았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동네 1호 깡패’로 등록이 돼 있었다. 동네 주민들과 사소한 일로 다툼을 벌였던 게 이유였다. 이씨는 “내가 무슨 깡패냐”고 항의했다. 경찰은 설렁탕까지 사주며 “교육만 좀 받으면 된다”고 삼청교육대 입소를 강요했고, 계속된 조사에 지친 이씨는 도장을 찍었다. 8월 2일 그는 삼청교육대로 보내졌다.
삼청교육대 연병장에는 이씨 같은 민간인들이 모여 있었다. 군인들은 입소생을 사정없이 구타했다. 이씨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게 무슨 짓들이냐. 우리나라는 법치주의 국가다. 죄 없는 사람들을 근거도 없이 데려다 왜 마구 때리느냐”고 항의했다. 군인들이 다시 몰려들어 이씨를 집단 구타했다. 이씨는 맞으면서도 “국민의 군대가 무고한 국민들을 이토록 때려잡느냐”며 “전두환 정권과 군 당국의 합작이냐. 책임을 반드시 묻겠다”고 항의했다. 계속된 군인들의 구타와 단체기합에 꼬박꼬박 항의했던 이씨는 여러 차례 ‘특수교육대’로 보내졌다. 특수교육대에서도 군인들의 폭행은 계속됐다. 동료 입소자들은 “시키는 대로 하자”고 달랬지만 이씨는 “우리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야 하느냐”고 굽히지 않았다. 동료들은 불똥이 튈까 이씨를 피했다. 그 후로도 기합과 폭행은 10개월 동안 이어졌다. 이씨는 결국 폭행으로 왼쪽 다리에 장애를 입고서야 삼청교육대를 나올 수 있었다.
이씨는 분에 못 이겨 ‘불법을 저지른 사람들을 모두 영창에 보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경찰서 등을 찾아 억울함을 호소했다. 1989년에는 ‘삼청피해자동지회’를 만들어 최규하·전두환 전 대통령 등을 고소했다. 2001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 심의위원회(이하 위원회)에 보상금 지급도 신청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이씨가 민주화운동 때문에 입소한 게 아니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을 내렸고, 이씨는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판사 최주영)는 이씨가 위원회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했다고 2일 밝혔다. 재판부는 “이씨가 권위주의적 통치에 직접 항거해 민주헌정 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고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회복·신장시킨 활동으로 상이를 입은 경우”라고 판단했다.
과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삼청교육대에서 총에 맞아 사망한 전모씨 등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한 사례가 있지만 생존 피해자가 판결로 이를 인정받은 것은 처음이다.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신군부에 의해 1980년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6만755명이 영장도 없이 검거됐으며 그 가운데 3만9742명이 삼청교육대에 입소했다. 전체 검거자의 35.9%는 전과가 없었고 교육기간 폭행 등으로 54명이 숨졌다.
이씨는 국민일보와의 전화 통화에서 “삼청교육대를 지시한 전두환 전 대통령을 잡아들여 조사해야 삼청교육대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했다.
정현수 나성원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