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9) 애양원 들이닥친 순천 반란군 “손목사 어서 나와!”
						입력 2013-07-02 17:48  
					
				시궁창에 버려졌다 간신히 생명을 구한 그 교장 선생님은 결국 서울로 옮겨갔다고 했다.
그 시절에는 어른들보다 학생들이 더 격렬했다. 툭하면 두 패로 나뉘었다. 좌익은 공산당, 우익은 기독학생회가 대표적인 조직이었다. 자습 시간만 되면 학생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진다. 너희가 옳니 우리가 옳니 시비가 벌어지면 패러독스니 뭐니 온갖 논리가 나오다가 결국에는 주먹이 올라갔다. 자습 시간에 논쟁을 하다 격해지면 교사들이 와서 말리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우익 학생이 좌익 학생을 구타하고, 좌익 학생이 우익 교사를 폭행하는 일도 흔했다. 유도를 잘하는 학생이 교사를 들어올려 창 밖으로 던진 일도 있었다.
순천만 그랬던 것은 아닐 것이다. 서울에서도 날마다 찬탁 반탁 시위가 벌어졌고, 대구에서도 혼란스러운 일이 있었다. 온 나라가 그렇게 나뉘어 싸웠다. 그런 시절에 교회도 분열돼 화합하지 못하였으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런 분열과 대립은 우리 가족에게 크나큰 비극으로 다가왔다.
1948년 10월 19일이었다. 그날은 가을소풍을 가는 날이었다. 나는 순천 매산여중 1학년이었고, 동인 오빠는 25살, 동신 오빠는 19살이었다. 소풍 가방을 메고 나서는 나를 큰오빠가 불러 세웠다.
“동희야, 잠깐만.” 오빠는 언제 준비했는지 우유와 과자를 가방 속에 넣어주고 용돈도 쥐어주었다.
“오빠, 고마워. 나 오늘 여수 쪽 신성포로 소풍 가고 내일은 쉬니까, 오늘 바로 애양원으로 갈 거야. 거기서 하루 있다가 다음날 바로 학교에 갈 테니 나 기다리지 마.” 나는 말을 마치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가려 대문을 향했다.
“동희야.” 오빠가 또 나를 불렀다. “왜 자꾸 불러.” 오빠는 내 소풍 가방을 다시 살펴보더니 내 손을 꼭 잡았다. 오빠는 한 번 더 나를 불러 세웠다. 세 번이나 그러니 장난치는 것 같기도 했다.
“별일 아냐. 소풍 잘 갔다 와.”
나는 오빠가 또 나를 부를까 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나갔다. 그것이 두 오빠와 이 땅에서 마지막 나눈 인사였다. 그날이 소풍날이 아니었다면, 소풍을 애양원에서 가까운 곳으로 가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가 그날 순천의 자취집으로 들어갔다면 내 운명 역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그날 하루 고운 단풍을 만끽하고 나는 애양원으로 갔다. 이상하리만치 단풍이 예뻤고, 기분이 좋았다. 다음날에는 애양원 친구들과 바다로 나가 꼬막이며 바지락을 잡았다.
21일이 되었다. 순천에 있는 학교로 가기 위해 아침 일찍 신풍역으로 나갔다. 이맘때면 기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달려와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대신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사람들 틈으로 비집고 들어가 이야기를 엿들었다. 지금 여수와 순천에 주둔해 있던 국군 제14연대의 군인들 사이에서 반란이 일어나 서로 싸우다 좌익 군인들이 부대를 점령했다는 것이다. 반란 군인들은 여수와 순천 시내까지 자신들의 관할로 두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 지 불과 65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기차가 오지 않는 것도 반란군이 철길을 막아서라고 했다.
나는 터덜터덜 집으로 되돌아 왔다. 너무나 엄청난 사건이어서 그랬을까. 이때까지만 해도 사태가 심각한 줄 몰랐다. 두 오빠와 순천에 있던 동림이도 집으로 왔다. 오빠들이 “부모님이 걱정하시니 너는 집에 가 있으라”고 보냈다는 것이다. 오는 길에 시체가 곳곳에 널부려져 있고 반란군이 곳곳에서 검문을 했다고 한다.
그날 밤, 멀리서 트럭 소리가 들려왔다. 외딴 곳인 애양원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나는 공연히 불안해 트럭이 우리집을 지나가길 빌었다. 그 트럭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우리 집 앞에서 멈췄다. 대문을 걷어차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람들이 몰려들어 왔다. 앳된 얼굴의 학생들이 총칼과 죽창을 들고 있었다. “여기가 손양원 목사 집이지? 손 목사, 어서 나와!”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