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김명호] 남재준의 판단
입력 2013-07-01 18:26
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은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했을까. 국가적으로, 정치·사회적으로 어떤 득실이 있을까. 그리고 국정원은 어떤 상태로 될까.
지난 일주일 내내 그 의도를 짐작해 봤으나 도대체 내 머리 수준으로는 해답을 찾기가 어려웠다. 국가 최고급 정보를 다루고 있으니 일개 기자 정도가 생각지 못하는 심오한 뜻이 있었을까. 분명한 것은 실(失)보다는 득(得)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럴까.
2007년 정상회담에서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은 여야가 대선 전부터 공방을 벌이던 사안이었다. 남 원장은 야당이 국회에서 여권과 국정원의 NLL 공모설을 주장하자 ‘야당의 조작·왜곡’으로 반박했다.
국정원 스스로 정치 한복판에
회의록 전문을 읽어본 남 원장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남한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으로 생각했을 게다. 영토선을 포기하다니…, 적군 사령관 앞에서 굴종적 모습을 보이다니…. 평생 군문(軍門)에 몸을 담은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애국심’과 ‘정의감’이 작동했으리라 짐작한다. 전직 대통령과 그 추종 세력들을 국민들 앞에 낱낱이 고발하고 싶었을 게다.
회의록을 읽어본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했겠다. 우리 사회에서 평균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고 투표권을 행사해본 사람이라면, 회의록을 읽어보고 우리 대통령이 ‘좀 굴종적으로 표현한 게 있다’라면서, 동시에 ‘참 노무현스럽게 표현했구나’라고 느낄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를 5년 동안 경험했고, 그가 추구했던 바를 알고 있으며, 추진 방식에 문제가 있었고, 결국은 그 방식이 실패했다는 점을 알고 있다.
공개 이후 여론조사(갤럽)는 대화록 공개가 ‘잘한 일 35%’ ‘잘못한 일 45%’로, ‘NLL 포기다 24%’ ‘포기 아니다 53%’로 나타났다. 어차피 각자의 정치적 성향대로 해석하게 돼 있다. 이쯤 되면 국정원이 무엇을 의도했든 여론이 그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남 원장은 조작·왜곡을 명분으로 국정원을 정치 한복판에 끌어들였다. ‘국론 분열이 심화되고 국가안보에 심각한 악영향이 초래되는 것을 우려’해 공개했다고 했으나, 국론은 더욱 분열됐다. 공개 전후로 국가 안보에 어떤 변화가 있다거나, 변화 조짐이 있다고 보는 사람은 없다.
국정원 스스로 ‘6년 전 내용이어서 국가안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으면서도, ‘국가안보에 심각한 악영향을 우려해 공개했다’는 설명도 비논리적이다. 국정원은 정치권 공세에 수준 낮게 대응했다.
‘무명의 헌신’ 자세로 임해야
정치공학적으로도 지리멸렬했던 야당을 뭉치게 했고, 폐족(廢族)이었던 친노 세력이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방미 성과를 깎아내렸던 ‘윤창중 스캔들’과 비슷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북한을 다룰 국정원 업무는 또 어떻게 해나가려는지.
무엇보다 댓글 수준이었던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상황을 전 여권이 신경써야 할 대형 이슈로 만들어버렸다. 국정운영에 부담이 된다. 단 하나, 한 줌의 극단 보수층으로부터는 ‘시원했다’는 칭찬을 들을 것 같다.
공개 결정까지 국정원 지휘부는 내부 의견을 수렴했을 것이다. 아마도 정권 초기 1급 간부 30명 중 28명을 내보낸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반대 의견을 쉽게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이 또한 수준 낮은 집단사고(group thinking)의 전형이다. 정무적 판단 능력과 정치적 개입은 차원이 전혀 다른 얘기다.
‘자유와 진리를 향한 무명(無名)의 헌신’(국정원 원훈). 국정원장과 간부들이 다시 한번 되새길 문구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에서 일한다면 말이다.
김명호 편집국 부국장 mh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