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8) 해방 기쁨도 잠시… 나라와 교회, 분단·갈등 속으로
입력 2013-07-01 18:33
언젠가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우리 민족이 해방 뒤에도 38선으로 갈라진 것도 한국 교회가 신사참배라는 범죄를 범교회적으로 저지른 것에 대해 하나님이 진노하셨기 때문이라고. 해방은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 순교자와 옥중 성도들의 공이요, 분단은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선량한 성도들을 현혹하고 나쁜 길로 인도한 교회 지도자들의 죄의 대가인지도 모른다고.
아버지는 해방 이후에 교회가 신사참배를 한 사람과 안 한 사람으로 나뉘는 것도 마음 아파하셨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고 완전한 신앙의 표준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며 고신파와 총회파로 대립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으셨다. 실제로 해방 이후 출옥 성도인 재건파의 지도자 최덕지 선생이 아버지를 찾아와 재건파와 함께 한국 교회를 바로잡자고 권유했을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 주님도 죄인을 구하려 나 같은 죄인이 사는 땅에 오셨는데 내가 어떻게 현재의 교회를 끊어버리겠습니까.”
돌이켜보면 해방 이후에 교회가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며 화합하지 못했던 것이 훗날 교회 분열의 단초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아쉬움이 있다.
사실 일제시대에 그 강압과 고문을 감수하면서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것은 지금 우리가 막연하게 느끼는 것보다 훨씬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투철한 신앙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실족한 이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며 사신 생명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화해와 포용이 어느 때보다 필요했지만 그럴 만한 마음의 힘이 우리에게는 없었다.
교회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 우리 민족은 큰 분열과 갈등을 겪지 않았는가. 그 대립이 우리 가족에게 비극으로 닥쳐왔지만, 우리 민족도 지금까지 분단의 비극을 날마다 살아가고 있다.
순천에서 두 오빠와 동생 동장이와 넷이서 같이 살면서 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맏이인 동인 오빠는 노래를 참 잘했다. 순천사범학교의 오경심 선생님은 음악경연대회 때마다 오빠를 앞장세웠고, 오빠는 늘 최우수상을 받아왔다. 오 선생님은 오빠에게 미국으로 유학을 가라고 권하기도 했다.
순천사범학교 안에 기독학생회가 만들어졌는데, 오빠는 회장으로 당선됐다. 순천중학, 여중학, 순천농업학교와 매산학교 등 순천의 학교마다 기독학생회가 조직돼 순천 연합 기독학생회가 탄생됐다. 이 모임에서도 동인 오빠가 회장을 맡았다. 얼마 안 되어 전국에 걸쳐 한국기독학생회(KSCF)가 결성됐다. 잘생긴 데다 성품도 강직했던 오빠는 여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좋았다. 그 덕분에 나도 언니들에게 귀한 선물을 받기도 했고 빵집이며 맛있는 음식점에 곧잘 초대받기도 했다.
하루는 오빠가 나에게도 음악을 공부하라고 권했다. 큰오빠의 모습은 지금도 내 눈앞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동희야. 오빠가 너 피아노 배울 수 있게 해줄 테니 나중에 오빠가 노래할 때 꼭 반주해 줘야 한다. 알았지.”
며칠 안돼 나는 구자례라는 여선교사님께 피아노를 배우게 됐다. 평생 산으로 쫓겨 다니고 고아원에서 살아야 할 줄로만 알았던 나로서는 꿈과 같은 일이었다. 반대로 그 피아노 공부가 오빠에게 받은 마지막 선물이 될 줄은 그때로선 역시 짐작도 할 수 없었다. 피아노를 배운 덕분에 나는 신앙에 회의감을 가지고 방황할 때도 반주를 하기 위해 교회를 빠지지 않았고, 그 덕분에 새롭게 신앙을 다잡을 수 있었다.
그 무렵 중학교와 종합학교에선 학생들도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서 대립했다. 한번은 순천 승주교회 나덕환 목사님의 아들인 제민 오빠가 이런 얘길 들려주었다. “동희야, 어젯밤에 어느 학교 교장선생님이 괴한에게 실컷 두들겨 맞고 시궁창에 던져진 걸 사람들이 겨우 구해냈대.”
단지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그런 일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