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손병호] 여백을 남기는 사회
입력 2013-06-30 19:12
정치권에서는 이제 ‘복도 브리핑’의 취지가 거의 무색해졌다. 이 브리핑은 국회의사당 건물 1층의 기자회견장인 ‘정론관’ 밖 복도에서 이뤄지는 브리핑을 말한다. 마이크 앞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기 곤란한 속사정이나 상대 당(黨)이 들어선 안 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자리다.
비단 이 경우뿐 아니라 다른 ‘비보도 전제’ 또는 ‘딥백그라운드(deep background·출처를 밝히지 않는 조건으로 이뤄지는 심층 배경 설명)’ 형태의 설명도 복도 브리핑으로 통칭해 왔다. 하지만 요즘은 보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딥백 형태의 복도 브리핑도 그대로 인용된다. 실명을 밝힐 때도 많다. 복도 브리핑의 은밀한 설명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상대 당으로 흘러들어가는 경우도 다반사다.
흘러들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 아주 심각하게 흘러들어간 때가 지난 대선 당시 민주당 문재인, 무소속 안철수 후보 간 단일화 협상 상황에서였다. 당시 양측은 머리싸움이 치열했다. 그런데 한쪽에서 출입기자들에게 ‘오프 더 레코드(off the record·비보도)’를 전제로 설명한 내부 전략이 그대로 상대 진영으로 넘어가거나 기사화됐다. 심지어 문 후보 측 인사가 담배를 피우며 대수롭지 않게 상대를 향해 발설한 불만들조차 기사화되거나 발언이 누출됐다. 안 후보 측은 즉각 “우리가 다 듣고 있다”면서 해당 발언을 문제삼았다. 민주당 선거대책본부 출신 한 의원은 30일 “당시 우리 쪽 내부 동향이 거의 실시간으로 안 후보 쪽에 누출됐고, 일부 언론이 계속 싸움을 붙이면서 단일화가 더 어렵게 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언론이 싸움을 붙이기로는 최근 가수 장윤정씨의 경우에 극에 달했다. 최근까지 네이버(naver)와 다음(daum) 첫 화면은 장씨 가족들 간의 불화를 다룬 뉴스로 도배가 됐다. 특히 종합편성채널(종편)과 일부 선정적 신문들은 장씨와 그 가족들 간의 불화를 부추기는 기사 생산에 열을 올렸다.
한 종편 프로그램은 장씨 어머니와 동생을 스튜디오까지 초청해 인터뷰하는 등 가정불화로 시청률 장사를 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선정적 매체들은 장씨가 결혼(6월 28일)을 앞둔 상태인데도 전혀 ‘빈틈’을 주지 않고 끊임없이 이전투구의 장으로 불러들였고, 뭐든지 다 써댔다.
취재원에 빈틈을 주지 않는 또 다른 케이스는 최근 터진 권영세 주중 대사의 ‘밥자리 녹음 파일’ 사건이다. 모 월간지 기자는 몇 달 동안 권 대사를 만날 때마다 휴대전화로 발언을 통째로 녹음해 왔다. 공식 오·만찬 행사도 아니고 간담회 자리도 아닌 사적 공간에서 이루어진 허락받지 않은 녹음이었다. 통상의 취재 규범에서 벗어난 것이고, 뭐든 일단 남김없이 쓸어담으려는 일종의 약탈적 취재 관행이 빚어낸 참사라 할 수 있다.
비슷한 참사는 계속 일어날 수 있다. 취재원의 사정을 고려치 않고 뭐든 다 기사화하고, 별것 아닌 일도 ‘굉장한 사건’인양 부풀리고 시청률과 클릭 수, 댓글 수에만 함몰돼 선정성을 계속 강화하는 언론과 인터넷 포털이 온 나라를 뒤덮고 있기 때문이다.
취재원에게 빈 공간을 주지 않고, 또 거르지 않고 뭐든지 다 전달하면 사회는 점점 더 품격을 잃을 것이다. 당장 눈길이 가도 부지불식간에 그런 걸 접하는 이들도 품격을 잃기 마련이다. 빈 공간을 남겨 ‘숨통을 터주는 사회’, 때로는 눈 감아줘서 ‘여백이 있는 사회’를 만들려면 결국 언론 소비자들이 바뀌어야 한다. 선정적 매체들과 과감히 이별하는 것이다.bhson@kmib.co.kr
손병호 정치부 차장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