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볼리비아 전명진 선교사] ‘할렐루야 아줌마’와의 만남… “남미로 가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입력 2013-06-30 17:25


인생의 길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나의 선교 사역은 가족의 이민사와 아르헨티나 사역을 떼어놓을 수 없다. 1974년 남미 파라과이 이민 수속을 마치고 여권까지 받은 상태에서 아버지는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고 손도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상태에서 17세 나이로 남은 가족과 함께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게 됐다. 외국이면 무조건 잘사는 나라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지는 정반대 상황이었다. 당시 볼리비아는 신발도 제대로 신은 사람이 없는 그런 나라였다.

파라과이 한인교회는 연합장로교회 하나밖에 없었다. 한국에 있을 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몇 년 후 어머니는 조용기 목사님의 설교 테이프를 가지고 집에서 몇몇 분이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됐다. 이것이 파라과이 순복음교회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얼마 후 허균 목사님이 부임하셨고 예배 드릴 장소조차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을 때 웬 할머니를 초청해 부흥회를 열었다. 그분은 우리집에 며칠 머무르시며 성회를 인도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할머니가 바로 ‘할렐루야 아줌마’ 최자실 목사님이었다. 그 후로 최 목사님은 나의 영적 어머니가 되었다.

81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최 목사님에게 “기도만 하면 남미로 들어가라는 음성이 들린다”고 말씀드렸다. 최 목사님은 “성령님의 강한 인도가 있었으면 그 음성에 순종하고 남미로 들어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86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볼리비아를 작정하게 됐다.

볼리비아는 파라과이보다 더 어려운 나라였다. 중남미를 통틀어 제일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인디언들이 많았고 한 종족이 아니라 여러 종족이 사는 나라였다. 대부분의 도시가 백두산 해발고도 이상의 높이에 위치했다.

볼리비아에서 가족이 함께 사역을 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1년을 볼리비아에서 부교역자로 일한 뒤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역시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렵게 다락방이 딸린 월 50달러짜리 장소를 얻게 되었고 87년 12월 13일 남미순복음교회를 개척하게 됐다. 그리고 88년 2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선교사 임명을 받았다. 아르헨티나에서 사역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당신의 뜻이면 저를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곳에서 한 우물을 파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국땅에서 교회를 개척한다는 게 얼마나 무모하고 힘든 일인지 깨닫게 됐다. 헌금이 1만 달러가 모아졌을 때 교회로 사용할 집을 구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작은 집 하나를 구입하려면 적어도 5만 달러 이상이 필요했다. 하나님께 자체 성전을 달라고 매달렸다.

우리가 자체 성전을 가지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사기를 당했기 때문이다. 예배 장소가 비좁아 옆집에 세를 얻었는데 어느 날 현지인들이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빈집만 골라 들어가 사는 무법자들이었다. 어린 아이가 여럿 딸린 볼리비아인 다섯 가족이 가짜 서류를 내놓고 자기들이 세를 얻었다고 우겼다. 이런 경우 경찰이 와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보통 재판을 하는데 짧게는 1년, 길게는 수년이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되면 보통 불법 침입자들은 돈을 요구한다.

나와 교인들은 매일 기도하면서 건물을 찾아다녔다. 오래된 옛날집인데 10만 달러를 달라고 했다. 주인은 절대 그 이하로 팔 수 없다고 했다. 낙심하며 큰 대로변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중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집을 판다는 대형 간판이 보였다. 공간도 넓고 교통편도 좋은 곳이었다. 15만 달러는 족히 되겠다는 생각에 그 집을 찾았다.

“집이 얼마나 합니까?” “5만3000달러입니다.”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그럼 주인에게 4만7000달러에 거래를 할 수 있겠냐고 물어봐 주세요.” 다음날 중개업자에게서 연락이 왔다. 주인이 그 가격에 팔겠다고 했다. 그렇게 헌금 1만 달러로 집 계약을 했다.

일단 일은 저질렀지만 문제는 잔금이 없었다. 아르헨티나는 계약 위반 시 계약금의 200%를 물어내게 돼 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 매달리기 시작했다. 개척한 지 얼마 안돼 성도들은 몇 명 되지 않았고 대부분 이민 온 지 얼마 되지 않는 교인들이었다. 당장 발에 불똥이 떨어지자 온 성도들이 기도로 하나되었다. 당시 교회 헌금이 한 주에 50∼100달러 모이던 때다.

하나님께서는 정말 희한한 방법으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다. 한국에서 아르헨티나 언니 집을 방문한 한 자매가 시차 적응이 안돼 우리 교회 새벽예배에 나왔다. 그리고 젊은 전도사가 울며불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궁금증이 생겼다고 한다. “언니, 전도사님이 무슨 어려움을 당한 것 같은데요?” 자초지종을 들은 그 자매는 예수도 믿지 않았지만 2만 달러를 우리에게 빌려줬다.

그 돈을 들고 중개업자에게 달려갔다. “잔금으로 3만7000달러를 드려야하는데 죄송하지만 지금 갖고 있는 돈이 2만 달러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10개월간 나눠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주인께 잘 좀 말씀해 주세요.” 중개업자는 어이가 없다는 듯 화를 내면서 “계약금 1만 달러는 이미 없어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주인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주인은 우리의 사정을 듣고 그렇게 해 주겠노라고 했다. 시가 15만 달러의 건물을 1만 달러에 구입하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그 후 하나님은 우리 교회를 조금씩 부흥케 하셨고 빌린 돈과 잔금을 하나도 밀리지 않고 다 해결해 주셨다. 하나님은 항상 비전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그렇게 7년간 하나님 은혜 속에서 부흥을 거듭했고 장소가 비좁아 옮길 상황이 됐다. 건물을 매물로 내놓자 복덕방에서 연락이 왔다. “지금 건물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30만 달러에 사겠답니다!”

이후 4만5000㎡(1만5000평)의 장소를 구입했고 중남미 선교의 교두보로 차근차근 그림을 그렸다. 3개의 현지인 교회를 세웠고, 아르헨티나 하나님의성회 신학교 분교도 설립했다. 수요일과 금요일, 주일 오전·오후에는 한인교회에서, 화요일과 목요일, 주일 저녁에는 현지인 교회 사역을 인도했다. 그렇게 열심히 사역하고 있을 때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선교국으로부터 공문 한 통이 날아왔다.

‘전명진 선교사는 볼리비아로 이동하시오.’

아닌밤중에 홍두깨 같은 일이었다. 이제 선교의 방향이 정해지고, 사역이 안정권에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나와 아내는 볼리비아로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선교국에서는 볼리비아에 위치한 중남미총회 신학교를 운영할 사람이 없다고 했다. 아르헨티나에 있으면서 하나님의성회 신학교 운영 경험이 있는 전 선교사가 가야만 신학교를 잘 운영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선교국장님과 위원장님은 장시간 나와 아내를 설득했다. 한인과 현지 성도들은 울면서 절대 가지 말라고 매달렸다. 네 명의 딸도 학교에 잘 적응하고 있었다. 그땐 정말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 할 것인지 결단해야 했다. 아내와 나는 위의 권세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후우. 하나님, 볼리비아로 가겠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결국 우리는 “선교사이기 때문에 하나님 명령에 순종해야지 내가 가고 싶으면 가고 오고 싶으면 오는 사역이 아니다”라는 고백을 했다. 하나님께선 그때부터 우리 부부에게 평안한 마음을 주셨다.

볼리비아 전명진 선교사

● 전명진 선교사

-1957년생. 대한신학교, 볼리비아 순복음신학교, UNPI 졸업

-기하성 여의도순복음 소속, 1988년 2월 파송

-볼리비아 한국하나님의성회 법인 설립

-한인 및 현지인 목회자 재교육 사역, 볼리비아 영산신학교, 볼리비아 베데스다대, 고아원 운영, 인디언(과라니족) 새마을운동, 진료소 운영, 라디오 방송굿피플 어린이 사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