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7) 해방후 교단 갈등 심화… 아버지 “회개하라” 일갈
입력 2013-06-30 17:16
감옥 문은 해방 이틀 뒤인 8월 17일 밤 11시에 열렸다. 감옥 문을 나서는 아버지는 누구의 마중도 받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다니는 바람에 어머니와 오빠들은 해방이 온 줄 몰랐다. 2주일이 지난 뒤에야 일본인들이 물러간 것을 알았다니, 누가 아버지를 마중했겠나. 그날이 며칠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드는 황혼녘이었다. 애린원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턱밑까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앙상했다. 다 해진 푸른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아버지였다.
우리는 “아부지!” 한마디 하고는 그 품에 안겼다. 이제 다시는 ‘아버지’라는 말은 내 입에서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것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누추한 모습이라도 좋기만 했다. 마음 아팠던 것은 주기철 목사님의 아들 영해 오빠의 모습이었다. 이 기쁜 날에도 영해 오빠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오빠는 우리 아버지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주기철 목사님은 1년 전인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교하셨다.
진주에서 나환자들과 살던 작은오빠는 나무통 공장 사장 박신출 집사님 댁에 왔다가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진주 남강 다리 밑 나환자들이 우리 가족을 도와줬다는 얘기를 듣고는 눈물을 흘리더니 곧장 남강다리로 달려갔다. 거기서 부흥집회를 열었다.
그곳에서 황고모와 의논한 끝에, 작은오빠와 아버지는 애양원으로 갔다.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나환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이자 나환자들은 함성을 지르며 환영해주었다. 남해 산골에 숨어 있던 큰오빠와 어머니, 동림이도 애양원 사람이 찾아가 불러왔다. 비로소 우리 가족이 다시 모였다. 애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다 일제의 추방으로 떠났던 월슨 박사와 원가리 선교사도 왔다. 애양원을 떠났던 나환자들도 속속 모여들었다. 험한 세월이었지만 하나님은 머리털 하나도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셨다.
나는 학교도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도 가고 싶었던 학교, 돈이 없어서가 아니고 가기 싫어서가 아니고 신사참배를 할 수 없어서 가지 못했던 그 학교였다. 애양원은 산간 벽지여서 근처에 학교가 없었다. 우리 남매는 50리 떨어진 순천의 학교로 가야 했다. 5년의 공백이 길긴 했지만, 큰오빠는 순천 사범학교(현재 순천 농업고등학교) 4학년으로, 작은오빠는 순천중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나는 나이대로 하자면 6학년에 다녀야 했지만 학교는 가보지 못한 입장이라 어찌어찌 4학년으로, 동생 동장이는 2학년으로 들어갔다. 공부를 따라가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오빠들은 밤 12시까지 코피를 흘리며 공부에 열중했다. 나는 아직 쉬운 과정이라 그런지 공부나 학교생활이나 온통 신나기만 했다. 성적이 쑥쑥 올라 이듬해는 월반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46년 3월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지 만 8년 만이었다. 졸업 때 목사 안수를 받지 못한 것은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일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글을 자주 읽는다는 이유였다. 아버지는 우치무라 간조의 제자 김교신 선생과도 교분이 깊었다.
해방된 교회에는 혼란이 있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옥중 성도들과 신사참배를 했던 이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무슨 일만 있으면 “저 사람은 신사참배를 했대, 안 했대?”하고 따지는 것이 일이었다. 신사참배를 했던 이들 중에는 “우리가 교회를 지켰다”며 오히려 큰소리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강단에 올려둔 ‘천조대신’ 우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교회들도 있었다. 해방이 되어도 나쁜 습관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곳곳을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했던 아버지는 우상을 내동댕이치며 천둥과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회개하라!”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