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벳도 모르던 우리… 꿈을 노래해요” 일성여중·고 늦깎이 학생들 팝송경연대회
입력 2013-06-28 18:01 수정 2013-06-29 00:59
“첫 무대를 꾸며줄 분들은 고등학교 2학년 1반 다섯 명의 학생입니다. 박수로 맞아주세요.”
사회자의 소개가 끝난 뒤 ‘고2’로 소개된 다섯 명의 중년 여성이 무대로 걸어 들어왔다. 이들이 부른 노래는 트로트도, 민요도 아닌 팝송 ‘A love until the end of time’이었다. 서울 대흥동 마포아트센터에는 28일 일성여중·고 개교 61주년을 기념해 ‘팝송 경연대회’ 결선전이 열렸다. 못 배운 한을 품고 있다가 중년이 돼서야 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학생들은 2개월여 연습한 팝송을 들고 무대에 올랐다. ‘엄마’ ‘할머니’ ‘아줌마’로 불리던 이들이지만 무대에 오르는 순간만큼은 당당한 ‘주인공’이었다.
무대에 오를 순서를 기다리며 연습용 악보를 쥐고 있는 학생들의 손은 덜덜 떨렸다. 영어 가사를 내뱉는 입술엔 파르르 경련이 일어났다. 영문 가사 아래 발음을 한글로 빼곡히 써놓은 이들도 있었다.
올해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한 문명숙(55·여)씨는 같은 반 4명과 ‘I will follow him’을 불렀다. 가사 하나 하나에 힘을 실어 또박또박 발음했다. 긴장한 탓에 가끔 박자가 빨라지기도 했지만 이들은 고운 목소리로 화음을 만들어갔다. 해맑게 웃으며 율동을 하는 이들의 얼굴은 천진난만한 여중생 표정 그대로였다.
7남매의 넷째로 태어난 문씨는 오빠들을 위해 공부를 포기했다. 초등학교까지만 다닌 뒤 결혼해 자녀를 낳고, 손자가 생기면서 평범한 ‘중년 여성’으로 살았다. 하지만 마음 한켠에는 늘 배우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자녀들이 학창시절 가구조사서에 어머니 학력을 ‘고졸’로 적어 제출하는 것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최근에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손자가 “영어를 알려 달라”고 해 식은땀을 흘리기도 했다. 올 초 가족들의 격려로 새내기 중학생이 된 문씨는 팔이 마비될 정도로 글씨를 쓰며 공부하고 있다.
문씨는 “학교를 다니고, 팝송 연습을 하게 되면서 표정이 밝아졌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며 “늘 남편·자식을 위해 살아왔지만 공부를 시작한 뒤 사회복지사가 돼 어려운 이들을 돕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
‘진짜 고등학생’도 무대에 올랐다. 열일곱 나이지만 이 학교에 다니는 정모양에게는 아픈 과거가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왕따를 당해 마음의 문을 닫았다. 친구들은 “접촉하면 살이 썩는다”며 정양을 따돌렸다. 정양은 결국 지난해 5월 학교를 그만뒀고 올 초 이 학교에 입학했다. ‘Bad case of loving you’라는 노래를 부른 정양은 “함께 공부하는 이모들의 응원으로 마음의 상처도 많이 아물었다”며 “가수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했다. 경연대회를 지도한 강래경(31·여) 교사는 “팝송 대회를 준비하면서 영어를 한글 떼듯 외우고, 공부하며 익히는 학생들을 보며 대단하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