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와 만델라, 그들의 진한 우정
입력 2013-06-28 17:49 수정 2013-06-29 00:48
미국 상원 의원 버락 오바마(52)는 2005년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의 TV 스튜디오 뒤편에 있는 대기실에 들어가 30분간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윈프리가 남아프리공화국의 넬슨 만델라(95) 전 대통령에게 보낼 메시지를 달라고 부탁하자 그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양해를 구한 것이다. 펜을 손에 쥐고 머리를 싸매던 오바마는 “즉흥적으로 넬슨 만델라에게 글을 쓸 순 없지 않느냐. 시간을 달라”고 대변인 로버트 깁스에게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27일(현지시간) 이런 일화를 소개하며 오바마 대통령에게 만델라는 영웅이자 등불(beacon)과 같은 존재였다고 보도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지난 26일부터 아프리카 3개국 순방을 시작했지만 만델라 전 대통령을 만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폐 감염증으로 회복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만델라의 병세가 위독하기 때문이다. 만약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된다면 미국과 아프리카 대륙 모두에 큰 역사적 의미를 줄 것이다. 비록 서로 다른 세대를 살았지만 만델라와 오바마는 인종 차별을 뛰어넘은 첫 흑인 대통령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NYT는 오바마 대통령이 만델라와의 만남을 고대해 왔다고 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를 방문한 27일에도 그의 ‘영웅’ 만델라를 언급했다. “저의 첫 정치적 행동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옥시덴털 대학에 다닐 때 시작됐습니다. 남아공에서 일어난 일들에 영감을 받았고, 저는 1979∼1980년 반(反)아파르트헤이트(인종 차별 반대) 운동에 가담했습니다.” 오바마가 옥시덴털 대학에서 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벌이며 대학 이사회를 압박했을 때는 만델라가 27년에 걸친 수감 생활 중 거의 20년을 보낸 무렵이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다카르 인근 고레 섬에 자리한 ‘노예의 집(Maison Des Esclaves)’에도 방문했다. 그는 상념에 잠긴 얼굴로 과거 노예들이 팔려갔던 ‘돌아올 수 없는 문’ 앞에 한참 서서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떠 있는 대서양을 바라봤다. 고레 섬은 19세기 흑인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다. 오바마는 그러나 자신과 만델라의 삶을 비교하는 걸 주제넘은 행동으로 여겼다. 만델라가 남아공 로벤 섬 교도소에서 오랜 시간을 버텨낸 것에 비해 자신은 인종 차별 철폐를 위해 그 정도의 희생을 하지 않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200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을 때도 “이 상을 받았던 역사의 거인들, 슈바이처 박사와 조지 마셜(전 미국 국방부 장관) 그리고 만델라가 이룬 업적에 비해 제 것은 작습니다”라고 말했다. 만델라는 오바마 대통령의 수상을 축하한다고 밝혔다.
오바마의 친한 친구이자 백악관 선임고문인 발레리 재럿은 “만델라는 시련에 굴하지 않고 인내하는 강인함이 뭔지 오바마에게 보여준 인물”이라고 말했다. 오바마가 2010년 만델라의 책에 쓴 서문에도 존경의 마음이 드러난다. 그는 “만델라의 희생은 무척 숭고하여 모든 사람들이 인류의 진전을 위해 행동하게 한다. 나 또한 만델라가 촉구한 것들에 답하는 수많은 사람 중의 하나”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오바마가 자신의 영웅인 만델라와 직접적인 교류를 지속한 것은 아니었다. 만델라가 2005년 미국 워싱턴DC를 방문했을 때 두 사람은 처음 만났다. 만델라의 측근들은 당시 떠오르는 민주당 의원 오바마를 만날 것을 강하게 제안했고, 다른 모임으로 향하던 오바마는 만델라 측의 제안에 조지타운에 있는 포시즌 호텔로 급하게 차를 돌렸다. 오바마는 호텔에 들어서 의자에 앉아 있는 만델라의 손을 잡았다. 오바마가 첫 만남에서 매우 현명한 것처럼 보였다고 만델라의 손녀딸들은 전했다. 만남은 5분으로 짧게 끝났다. 오바마는 1년 뒤 남아공을 방문했을 때도 만델라가 갇힌 감옥을 둘러봤다.
2005년 두 사람의 조우는 오바마 운전기사 데이비드 캣츠가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다. 만델라 옆에 서 있는 오바마의 검은 윤곽을 찍은 사진이다. 오바마는 2010년 이 사진을 만델라 측에 보냈다. 오바마는 이 사진 하단에 “우리 모두의 영감, 넬슨 만델라께”리고 자필로 썼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