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두려움 속에서 태워져야
입력 2013-06-28 17:44 수정 2013-06-28 20:49
얼마 전 기독교 서점에 들렀는데 책 한권이 눈에 들어왔다. 마이클 호튼의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 부흥과 개혁사, 2009’라는 책이었다. 책머리는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됐다. 사탄의 손아귀에 떨어진 도시는 어떤 모습일까? 술집은 모두 문을 닫을 것이고, 도색물은 자취를 감출 것이며, 사람들은 친절하고 상냥하게 서로를 대할 것이다. 거리에선 악담도 고함도 사라질 것이며, 교회는 주일마다 사람들로 넘쳐날 것이다…그러나 예배에서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편안한 도시, 사람들로 넘쳐나는 교회, 그러나 그리스도 없는 예배, 마이클 호튼은 사탄의 도성이자 세속 도시를 이렇게 스케치해 놓았다.
사막 기독교가 알려준 것은?
오늘날 우리는 교회의 위기에 대해 말하곤 한다. 그런데 마이클 호튼이 말한 사탄의 도성은 적어도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아닌 것 같다. ‘오직 예수’라는 구호는 우리나라 예배에서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는 외침인 까닭이다. 나 자신도 ‘오직 예수’를 자주 설교하기도 하고 또 듣기도 한다. ‘오직 예수’가 살아있는 외침인데도, 흔히 말하는 것처럼 교회와 신앙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이 사실일까. 너무나 거창한 이런 질문을 논하고 답을 내리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대신 질문을 바꾸어 이렇게 자문하고 싶다. ‘내 신앙은 위기에 빠진 것이 아닌가’
소돔과 고모라는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당했고(창 18:32), 예루살렘은 단 한명의 의인이 없어 심판받았다(렘 5:1). 내가 소돔과 고모라가 찾던 의인이 아닌 것, 그리고 예루살렘이 원하던 한 명 의인이 아닌 것은 두려움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지옥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나는 사랑과 축복, 믿음과 은혜와 같은 단어가 기독교 신앙의 정수라고 배우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이런 단어에 의존하던 나는 자주 욕심 때문에 괴로워하고, 욕심이 강요한 인생의 짐에 버거워하기도 하며, 또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나는 근래에 이르러서야 내 삶에서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는 것이 나사 빠진 바퀴처럼 위험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안토니오스는 죽음이 닥쳐올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했다. 에바그리오스도 몸이 뻣뻣하게 굳는 죽음의 날, 심판대 앞에 선 자신을 생각하고 지옥의 고통을 떠올리며 내적으로 슬퍼하라고 권하였다. 사막의 기독교인들이 생각했던 지옥의 심판은 은유나 상징이 아니라 생생하고 현실적인 고통이었다. 영원한 불, 죽지 않는 구더기, 암흑, 이를 가는 고통 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징벌이다(마 11:24, 25:41). 반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삼가 자신을 돌아보던 의인들은 천상의 기쁨을 누리며 하늘나라의 지복에 참여한다. 사막의 기독교인들이 세상을 벗어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자신을 정결하게 다듬었던 것은 천국의 보상과 지옥의 형벌을 그리면서 살아간 때문이었다.
사막 기독교가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사랑도 아니요 믿음도 아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사랑과 믿음에 대해 배우면서 자라났지만, 사막 기독교 영성의 뿌리인 두려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전 12:13) 사랑도 믿음도 다시 깨달아가고 있다. “등불이 어두운 방을 밝히듯,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의 마음에 다가온다면, 그 두려움은 사람을 밝혀주고 모든 덕과 하나님의 계명을 가르쳐줄 것이다.” 사막의 구도자가 남겨 놓았던 이 말에 나는 크게 공감한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없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밝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다면 열망조차 위험하다. 하나님 아닌 어떤 것에 의지하면서 그것이 믿음인 양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없는 열망은 스스로를 우상으로 만들거나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우상으로 만들고야 만다. 우상을 부둥켜안고 기뻐하는 사람은 벌꿀에 탐닉하는 야생곰과 비슷한 존재에 불과하다.
“불쏘시개는 불 때문에 완전히 타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그 두려움이 그의 뼈를 태워 없애지요.” 인간은 뼈대로 지탱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신의 뼈가 아니라 죄악을 불태우는 두려움에 의해서 자신이 온전히 지탱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욕을 태워야 비움에 도달
두려움의 불에 의해 사욕이 태워져 사라져야 비움에 도달할 수 있고, 비움에 가까워야 비로소 쉼을 얻는다(마 11:28). 우리 존재는 둘 중의 하나일 뿐이다. 두려움에 의해 불탄 후 비워져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곁에서 쉼을 얻는 신부이거나, 아니면 자신이 만든 우상을 부둥켜안고 집착하는 불행한 바벨론의 딸이거나, 둘 중의 하나인 것이다. 사막 기독교로부터 내가 배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사막 기독교에 대해서 지금까지 내가 쓴 것과는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