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토크] 호르메시스 효과
입력 2013-06-28 17:36
1493년 5월 중순 경남의 바닷가 마을 웅천에서 굴과 생미역을 채취해 먹은 주민 24명이 연이어 급사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당대의 조선 임금 성종은 범인으로 복어를 지목했다.
조사해 보니 그들은 복어가 굴이나 생미역에 낳은 알을 먹고 복어 독에 중독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복어 독의 주성분인 테트로도톡신은 난소나 알에 많이 들어 있다. 굴, 생미역 등에 섞인 복어 알을 먹을 경우 사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자연에는 복어 독보다 훨씬 강한 독이 있다. 주름 제거와 미용 시술에 많이 쓰이는 보톡스가 그렇다. 보톡스는 클로스트리디움 보튤리눔이라는 박테리아가 배출하는 보튤리눔 독소를 정제한 것인데, 이 독소는 자연에 존재하는 천연독소 중 독성이 가장 강해 청산가리의 1조 배나 된다.
보톡스의 주름 치료 효과가 알려지게 된 건 캐나다의 캐러더스라는 의사 부부 덕분이다. 안과의사인 부인에게 눈꺼풀 경련 환자를 보튤리눔 독소로 치료하니 인상이 좋아졌다는 말을 전해들은 남편이 그 사실을 학회에 발표하면서 보톡스라는 상품명을 단 주사제로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전 세계적으로 보면 보튤리눔 독소는 여전히 미용보다 질병 치료 용도로 사용되는 비율이 더 높다. 사시 및 눈꺼풀 경련을 비롯해 전립성비대증, 다한증, 통증, 요실금, VDT증후군, 만성두통, 편두통 등 다양한 영역에서 치료제로 사용되고 있다.
복어 독인 테트로도톡신 역시 동물실험 결과 모르핀의 약 3000배에 달하는 진통 효과를 지닌 것으로 밝혀져 말기암 환자의 진통제로 개발되는 중이다. 이밖에도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독성물질들이 이처럼 용량만 잘 조절하면 좋은 치료제로 둔갑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두고 ‘호르메시스 효과’라고 하는데, 16세기 스위스의 연금술사 파라셀수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물질은 유독하며, 유독하지 않은 물질은 없다. 독이냐 약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오로지 양에 달려 있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여러 유럽 국가의 참여 하에 자연계 동물들이 지닌 독을 의약품으로 활용하기 위한 ‘VENOMICS’라는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자연에는 10만 종 이상의 독을 지닌 동물들이 존재하는데, 이 프로젝트는 DNA 시퀀싱을 이용한 대용량 분석법으로 약 1만 종의 새로운 독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할 경우 새로운 의약품이 다량 개발될 수 있다고 한다.
이성규(과학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