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전정희] 비열한 자들
입력 2013-06-28 17:35 수정 2013-06-28 17:39
조인성 주연의 영화 ‘비열한 거리’에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폭력 조직의 보스가 부하인 병두(조인성 분)에게 하는 말이죠.
“병두야,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딱 두 가지만 알면 돼. 나한테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그 사람이 뭘 필요로 하는지.”
이 영화에서 조직폭력배들은 결탁과 음모, 배신으로 점철되어 거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갑니다. 음습한 거리, 비열한 인간들이죠. 조인성의 연기가 탁월했던 영화입니다.
자, 거리의 배경을 바꿔 보죠. 지난 2월 13일 새벽 3시 무렵 광주광역시 동림동 한 교차로. 40대 치과의사 한모씨가 몰던 벤츠 승용차가 신호 대기 중이던 50대 최모 여인의 마티즈 승용차를 들이받습니다. 곧이어 마티즈 승용차에 불이 나고 그 차량의 운전자 최 여인은 차량 충격과 화재로 숨집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가끔 접하는 정말 불행한 사고라고 할 수 있죠. 어쨌든 한씨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됐습니다. 그리고 재판이 진행됐습니다. 광주지법의 김모 판사는 한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습니다. 집에 돌아가 치과의사를 계속 할 수 있게 된 거죠.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유족과 합의했고 차량이 자동차 종합보험에 가입된 점, 한씨가 평소 무료진료 등 봉사 활동을 하는 점 등 사정을 참작했다.”
죄에 대해선 이렇게 말합니다. “음주 수치가 높고 피해자가 자동차 안에서 불에 타 숨지는 등 피해가 중대한 점, 한씨가 음주운전으로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는 점 등을 보면 책임이 가볍지 않다.”
이미 음주운전 전력이 있었네요. 사고 당시 한씨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45%였습니다. 단순 사고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사고 당시 한씨의 승용차가 사고 현장에서 300m가량 떨어진 곳에서 발견된 것을 두고 뺑소니 혐의 적용을 검토했으나 속도를 줄이지 못했을 뿐 뺑소니 의사는 없었던 것으로 판단했다고 합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300m를 미끄러져 나갔다면 도대체 속도를 얼마를 낸 겁니까? 한씨는 이 사건을 조사한 경찰서 발전위원회 행정분과위원회 소속 위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있습니다. 자동차 안에서 타죽은 건 사람이 아니라 애완견인 듯한 인상이네요.
한씨의 입장에서 판사가 하나님 같겠습니다. 선대가 얼마나 덕을 쌓았으면 그리 풀려날까요? 풀려나도 보통 사람은 “나를 감옥에 넣어줘!”라고 하거나 죄책감에 다리 위를 서성일 것 같습니다.
법은 산 사람을 심판하고 역사는 죽은 사람을 심판한다고 합니다. 한데 이 심판 결과를 보면 “이놈의 나라가 과연 법치국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피해자 가족과 합의했다 하더라도 심판은 별개의 문제 같습니다. 새벽 3시. 그 비열한 거리에 가면 비명횡사한 한 여인이 서 있을 것 같은 공포를 느낍니다. 한이 서려 있을 것 같다는 얘기죠.
최근 ‘재벌가 사모님의 여대생 청부폭력’ 사건의 허위진단서 발급 의혹도 우리를 절망케 합니다. ‘권력’은 처벌받지 않는다는 인식을 갖게 하죠. 우리 사회는 ‘마티즈’는 죽고, ‘벤츠’는 여전히 씽씽 달립니다.
거리의 조직폭력배는 직접 폭력을 씁니다. 한데 권력형 폭력배들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 누군지, 그들이 뭘 필요로 하는지’를 찾습니다. 둘 다 비열한 자들입니다. 이러한 억울함은 메시아를 부릅니다. 이 땅에 법이 살아 있지 않으니 보통 사람들은 하늘의 구원을 바라보는 거지요.
전정희 디지털뉴스센터 선임기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