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코올 치료센터 ‘카프’ 폐쇄 위기] 주류산업協 지원 중단… 환자들 다시 술독 빠지나

입력 2013-06-29 04:02


고등학교 1학년때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거의 매일 소주 5병씩 마셨다. 술은 집안 내력이었다. 아버지도 알코올 중독자였고, 어머니는 알코올 중독에 도박 중독까지 있었다. 큰 형은 알코올 중독에 간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큰 누나는 교통사고로 차에 치여서, 작은 형은 화재사고로 숨졌다. 남동생과 여동생은 병사했다. 형제자매 4남4녀 중 1남2녀만 남았다. 불행했던 가족사는 그를 술독에 더욱 빠져들게 했다. 그는 “우울하고 힘들게 살다보니 스트레스를 이기려 술을 마셨던 것 같다”고 털어놨다.

그렇게 마셔댄 세월이 35년이었다. 그 사이 결혼도 하고 직장도 다녔지만 술은 끊지 못했다. 아내와 수차례 이혼 직전까지 갔고, 경찰서도 들락날락했다. 그러다 2005년 7월 운명처럼 알코올중독 치료기관 카프(KARF·한국음주문화연구센터)를 만났다. 이후 2년 8개월 동안 입원과 통원 치료, 직업재활 등을 거치며 그는 거짓말 같이 술을 딱 끊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8년째 단 한 방울의 술도 입에 대지 않고 있다. 오랜 알코올중독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는 백덕수(61·인천 부평구)씨 이야기다.

지난 25일 경기도 고양시 백석동 카프에서 만난 백씨는 환자가 아니라 카프의 직원이 돼 있었다. 카프에서 사회복지사, 중독상담가로 일한지 2년째. 카프에서 직영하는 1층 커피전문점에서 바리스타로 일한 지 1년째다.

그런데 백씨에게 35년만에 새 삶을 찾아준 카프가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지난 2월 여성병동에 이어 지난달 말 남성 병동이 폐쇄됐다. 100여명의 입원 환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들을 치료했던 2명의 의사도 잇따라 카프를 떠났다. 그리고 이달 10일부터 공식 휴원에 들어갔다. 현재 병원을 지키고 있는 이들은 간호사와 방사선사, 원무과 직원 등 10여명이다.

백씨는 “8년 전 7월 3일, 내가 처음 카프를 찾아와 금주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생일 대신 이날 미역국을 먹고 있다”면서 “카프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대한민국에 하나밖에 없는 통합 치료·재활시스템을 갖춘 카프같은 병원이 둘만 있어도 좋겠는데, 유일하게 하나 있는 것 조차 없앤다니 정말 가슴이 아프다”며 안타까워했다.

백씨와 함께 환자 발길이 뚝 끊겨 적막감이 도는 병원을 둘러봤다. 한때 알코올중독 환자들로 북적였던 3층 남성병동과 2층 여성병동의 병실들은 텅빈 채 침상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성병동 간호실을 혼자 지키고 있던 박지수(29) 간호사는 “5개월째 월급도 받지 못하고 있어 언제까지 버틸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절망스럽게 얘기했다.

카프는 ‘전문적 정신건강 프로그램을 통한 알코올 관련 문제해결’을 목적으로 2004년 문을 열었다. 한국주류산업협회로부터 매년 50억원의 출연금을 지원받아 운영돼 왔다. 알코올중독 치료 전문 병원 가운데 자의로 입·퇴원이 가능한 국내 유일의 개방병동 형태의 병원이다. 2∼3년에 걸친 재활치료, 동기강화, 인지행동, 분노관리, 예술치료 프로그램이 체계적으로 갖춰져 있어 환자와 가족들의 호응이 좋았다. 특히 중간 거주시설(그룹홈)인 서울 마포 감나무집(남성용)과 향나무집(여성용)은 병원 치료 후 오갈데 없는 환자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백씨는 “알코올중독자들은 직업을 갖지 않으면 금방 재발한다. 그래서 2006년부터 6개월간 입원·재활 치료가 끝난 환자들을 대상으로 카페, 택배, 화원 등의 일자리를 주는 직업재활프로그램(청미래)을 운영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8월부터 백씨가 팀장을 맡고있는 카프커피전문점에도 알코올중독을 극복한 직원 4명이 함께 일하고 있다. 커피전문점은 현재 사회적기업으로 성장했다. 백씨는 “중독자들은 카프를 마음의 안식처로 여긴다”고 했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수시로 술을 마시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는데, 그럴 때마다 카프에서 받았던 치료를 떠올리면서 유혹을 이겨낸다.

하지만 2010년 말부터 주류산업협회가 카프에 대한 출연금 지원을 중단하면서 사업 축소, 임금체불 등 파행을 겪어왔다. 지금까지 미납된 출연금은 155억원에 달한다. 주류협회 측은 겉으론 “병원 치료 위주로 운영하다 보니 본래 목적인 예방기능이 축소됐다. 치료사업을 중단하고 예방 쪽에 치중할 계획”이라며 출연금 중단 이유를 밝히고 있지만 진짜 이유는 수익성 하락이라는게 병원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병원 노조는 지난 19일부터 서울 남현동 주류산업협회 앞에서 미납 출연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몇일째 농성을 벌이고 있다. 보건의료단체들도 최근 보건복지부 앞에서 “관리감독 관청으로서 즉각 업무개시 명령을 내려 정상화시키거나 공공기관으로 전환하라”며 적극 대응을 촉구하고 나섰다. 하지만 복지부는 “민간 재단의 일이라 깊이 관여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다만 새 재단 이사진을 구성해 향후 병원 운영 방안 등을 모색토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백씨는 “병원이 문을 닫아 어쩔수 없이 떠난 환자들 중에 다시 술에 빠진 이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세계보건기구도 종합적인 알코올중독센터를 만드는 추세인데, 왜 이걸 없애려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카프는 기적, 부활의 공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알코올중독자를 상종 못할 인간으로 봅니다. 하지만 알코올중독은 엄연히 정신질환이고 제 때, 체계적 치료를 받으면 재발을 막을 수 있어요. 카프의 치료는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카프가 계속 환자들 곁에 있어야 하는 이유죠.”

고양=글 민태원 기자, 사진 곽경근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