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듣고 못 쓰는 친구들 위해 교수님 농담까지 한자 한자 노트북에… 예수님 사랑·말씀은 덤이구요”
입력 2013-06-27 18:08
장애학우들에 문자통역·대필봉사 하는 나사렛대 지체장애 이은실씨
지난 25일 오후 충남 천안 나사렛대학교의 국제관 강의실. 박종균 교수의 재활행정학 계절학기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강의가 중반으로 접어들면서 강의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인간재활학과 2학년 이은실(21·여)씨의 손도 바빠졌다. 그의 15인치 노트북에는 박 교수의 강의내용은 물론 농담까지 빠짐없이 기록됐다. 옆에 앉은 청각장애 학생은 노트북 화면과 박 교수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수업을 들었다. 휠체어에 앉아 강의내용을 기록하던 은실씨의 얼굴에는 땀방울이 돋기 시작했고, 노트북에 입력한 내용은 한 시간 만에 A4 용지 40페이지를 넘어섰다.
이날 ‘문자통역’에 나선 은실씨는 선천성 1급 지체장애인으로 지난 3월부터 문자통역과 대필봉사로 다른 장애학생들의 학교생활을 돕고 있다. 문자통역은 청각장애학생을, 대필봉사는 손이 불편한 지체장애 학생을 위한 것이다. 이번 학기 19학점을 수강한 은실씨는 자신이 신청하지도 않은 2과목(주당 6시간)을 별도로 청강하며 장애 학우들을 위한 봉사에 나섰다.
봉사활동을 한다고 학점을 더 받는 것은 아니다. 학교에서 약간의 장학금을 지원하지만 그리 많은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은실씨의 얼굴엔 자긍심과 행복감이 가득했다. 장애를 갖고 있지만 다른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감사하기 때문이다.
은실씨가 장애 학우들을 위해 봉사에 나선 것은 어릴 적 일반 학교에서 친구들로부터 도움 받은 경험의 영향이 컸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특수학교에서 일반학교로 옮겼을 당시 막막함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당시 친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대학진학은 이미 포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들은 새로 전학 온 장애 친구의 필기를 돕고 휠체어를 밀어주며 따듯하게 보듬어줬다. 덕분에 은실씨는 초·중·고를 무사히 마치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지난해 나사렛대에 진학한 은실씨는 봉사활동을 위해 1년간 많은 준비를 했다. 문자통역을 위해서는 빠른 타자능력이 필수. 하지만 은실씨의 타자 속도는 강의를 따라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1년간 연습 끝에 분당 600∼700타의 수준급 타이핑 능력을 갖게 됐다.
장애학우들을 위해 시작했지만 문자통역과 대필봉사는 은실씨 공부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교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높아졌고, 대필봉사를 하면서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하는 능력을 갖게 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은실씨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장애 학우들의 반응이다. 은실씨에게서 도움 받은 청각장애 학생 문아리(21·여)씨는 “자기 일보다 우리 일을 먼저 생각해주는 은실이가 정말 고맙다”면서 “한편으로는 은실이에게 도움 주는 게 없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그는 “은실이를 보면 나도 저렇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며 웃었다. 은실씨 덕분에 성적이 많이 올랐다며 고마워한 친구들도 있었다.
은실씨는 졸업 후 장애인들의 취업을 돕는 ‘직업재활사’로 일하는 게 꿈이다. 그는 “전에는 ‘장애가 또 다른 재능’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그 말이 이해가 된다”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신 예수님처럼 제가 가진 작은 힘으로라도 이웃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천안=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