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남도영] 원세훈 국정원의 교훈

입력 2013-06-27 18:35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은 취임 3개월 뒤인 2009년 5월 15일 국정원의 모든 간부를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정원이 일반 국정에 대해 우리 소관이 아니라고 (손)놓고 있다면 국정원은 이렇게 큰 조직이 있을 필요도 없고, 지부도 있을 필요도 없다. 우리 부서도 여러 개 있을 필요 없이 한 3분의 1 규모로 하면 될 겁니다.”

국정원 인력과 규모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원 전 원장이 어떤 근거로 이런 발언을 했는지도 알 길이 없다. 다만 원 전 원장의 ‘판단’에 따르면 2009년 당시 국정원 직원과 조직 3분의 2 정도는 ‘잉여 인력’이거나 본연의 업무가 아닌 일반 국정, 즉 ‘정치 개입’에 투입될 수 있는 인력이라는 의미가 된다.

원 전 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 수행을 보좌하는 것이 국정원의 임무’라는 확신에 따라 국정원 요원들을 종북세력과의 사이버 전투에 내몰았다. 전투의 형식은 보잘것없었다. 댓글을 달거나 찬반 표시를 하는 게 고작이었다.

반면 전투의 내용은 화려했다. 원 전 원장의 지시·강조 말씀에는 세종시, 정상외교, 무상급식, 4대강, 무역 1조 달러 달성, 주택시장 침체까지 주요한 국정 현안 대부분이 등장했다. 원 전 원장의 독려 속에 4년이 흘렀다. 국정원의 대통령 보좌는 성공적이지 않았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원세훈 본인도 지난 14일 국가정보원법과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의해 기소됐고, 다음달 8일 첫 재판을 앞두고 있다.

원세훈 국정원장 사건의 제1교훈은 ‘국정원 업무범위를 넘어서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오랜 기간 정보기관의 월권과 불·탈법 행위들을 지켜봐 왔으며, 이를 막기 위해 법으로 국정원의 업무를 엄격히 규정해 놓고 있다. 국정원법 3조 1항이다. 국정원의 업무는 국외 정보 및 국내 보안정보의 수집·작성 및 배포, 국가 기밀에 속하는 문서·자재·시설 및 지역에 대한 보안 업무, 내란 외환 반란 국가보안법 등에 대한 수사 등으로 한정돼 있다. 이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들은 불법은 아닐지라도 반드시 논란을 일으키게 된다.

원세훈 파문이 가라앉기도 전에 국정원이 다시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국정원은 지난 24일 남재준 원장의 지시에 따라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다. 남 원장은 25일 국회 정보위원회에 출석해 회의록 공개 이유에 대해 “야당에서 조작·왜곡 의혹이 잇따라 제기돼 국정원의 명예와 직원 사기, 국가 안위를 위해서 공개한 것”이라고 답변했다고 정보위 소속 국회의원들이 전했다. 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하지 않을 경우, 국정원의 명예가 훼손되고 직원 사기가 떨어지며, 국가 안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다. 수긍하기 어렵다. 국정원의 임무는 국가기밀을 지키는 것이지, 국가기밀을 공개하는 게 아니다.

이미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는 행위가 국정원법에 규정된 국정원 업무 어느 조항에 포함되는지도 잘 모르겠다. 남 원장은 “정치 개입이 아니다”라고 했다지만, 정치 개입 정도가 아니라 국정원 스스로 정치의 중심에 선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국정원은 음지에서 일하는 조직이다. 요즘 국정원은 너무 양지로 나왔다. 전임 원장은 국가정보원을 ‘국가홍보원’처럼 운영하다가 법의 심판대에 섰다. 현 원장은 스스로 정치적 논란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남재준 국정원은 원세훈 국정원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다.

사회부 남도영 차장 dy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