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김의구] NLL 대화록 뭐하자고 공개했나

입력 2013-06-27 18:33


“선선하게 풀 국정조사를 국격 실추, 갈등의 회오리로 몰고간 정치 막장 드라마”

2007년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이 전격 공개되기까지 과정을 보면 우리 정치는 변한 게 없다. 당초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의 국정조사를 놓고 벌어지던 논란이 서해 북방한계선(NLL) 공방으로 옮아가고 급기야 전례 없는 정상회담 대화록의 공개로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한 편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지난해 총선과 대선에 이어 올 2월 박근혜정부가 출범하고 진통 끝에 민주당 새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정치권은 상생의 정치, 야당을 파트너로 인정하는 정치를 외쳤지만 그저 구호에 그쳤다. 여야는 지독하게 정파적인 주장만 늘어놓은 채 이성적 해법을 찾지 못했다. 정치가 사회의 갈등을 해소하는 게 아니라 악화시켰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 문제는 애초 실시 여부가 큰 논란이 될 사안은 아니었다. 지난 3월 양당 전임 원내대표들이 새 정부 조직법 협상을 타결하며 검찰 수사가 마무리되면 열기로 합의가 이뤄진 것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이 국정원 전·현직들의 민주당 제보 과정 등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되지 않았다며 시기를 늦출 것을 요구했지만 국정조사 자체를 피해갈 도리는 없었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이나 김용판 서울경찰청장 등 핵심 피의자들이 기소됐기 때문에 민주당으로서도 ‘즉시 실시’를 고집할 사안은 아니었다. 국정조사는 시간 문제였고, 야당은 사상 초유의 국정원 조사를 통해 대선 과정에서 중립 의무를 다했는지 캐물을 수 있었다. 여당도 국정원이 종북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해 댓글을 다는 선전활동 가운데 어디까지가 정치 관여이며, 선거개입인지 검찰의 기소 문제를 따질 수 있는 기회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권 논쟁은 느닷없이 남북 정상회담의 NLL 발언록 문제로 옮아갔다. 여당이 원 전 국정원장이 대선국면에서 NLL 발언록 공개를 거부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선거 개입 의혹을 희석하려 하자 민주당 소속 박영선 국회 법사위원장이 국정원 제보라며 “NLL 포기 발언이 없었는데 국정원과 새누리당이 대선을 위해 시나리오를 짰다”고 주장한 게 발단이었다. 이에 새누리당 정보위원장 등이 국정원의 정상회담 대화록을 열람한 뒤 문제의 발언이 있었다고 맞받았고, 국정원은 발언록 전문을 전격 공개한 것이다.

발언록 공개 후 논란은 더 커졌다. 발언의 해석을 놓고 NLL 포기다, 아니다는 논쟁이 벌어지고 공개 절차의 적법성도 도마에 올랐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결과 새누리당은 목적을 달성했는가? 국정조사계획서를 7월 2일 처리키로 했고 노무현 정부의 종북 문제는 대화록 공개 이전처럼 여전히 논쟁중이다. 민주당은 조기 국정조사를 관철했지만 종북 누명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더 큰 문제는 국정원이다. 남재준 국정원장은 대화록 공개 이유에 대해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서였다고 답변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국가이익보다 조직 보전을 더 중시한다는 불명예를 자초했다. 음지에서 희생하며 양지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막강한 정보력을 동원해 다른 기관 이상으로 자기이익을 챙긴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국정원의 부담은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우리 내부 문제뿐 아니다. 북한이 “최고존엄에 대한 우롱”이라고 반발하면서 새 정부의 남북 관계는 더 냉각될 전망이다. 다른 국가들에 우리는 집안싸움을 하다 정상회담 발언까지 공개하는 나라로 낙인찍히게 됐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대화록 공개였는지 모를 일이다. 전임 원장 체제의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했는지 여부를 따지고 선선히 보완책을 마련하면 될 일을 국내에는 온갖 갈등의 소용돌이를, 대외적으로는 국격의 실추를 자초하는 지경으로 몰고 갔다. 여권이 무능력하거나 야당이 대선 결과에 미련이 남았기 때문이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중국의 지도부는 핵에 열을 올리는 북한을 향해 근래 눈에 띄게 변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 정치권은 중국 공산당에도 못 미친다.

김의구 논설위원 e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