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6) 일제 魔手 피해 온가족 찬송가 부르며 뿔뿔이 생이별
입력 2013-06-27 17:35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나 사람은 한치 앞도 알지 못한다. 1년여 뒤 일제가 물러났지만 그때 우리 가족의 심정은 어쩌면 영영 그렇게 헤어진 채 못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안타까움뿐이었다. 그러나 설령 다시 못 만나더라도 큰오빠가 신앙을 저버리는 것보다는 백배 나은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만주 하얼빈의 작은아버지 손문준 목사님 댁으로 가기로 했다. 작은아버지는 할아버지가 3·1 만세운동의 주동자로 붙잡혔을 때 일경의 추적을 피해 만주로 가셨다. 어머니와 막내는 부산 기장의 장부자 집으로, 작은 오빠는 애양원에서 나온 7명 나환자들이 있는 진주로, 큰오빠는 남해 깊은 산골로 가기로 했다. 나와 밑의 동생은 부산 구포에 있는 애린원(愛隣院)이라는 고아원에 들어가기로 했다.
자기 때문에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으니 큰오빠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내가 동생 동장이랑 고아원으로 가던 날 아침 오빠는 초췌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아빠가 계신데 왜 고아원에 가야 하는지 나와 동생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 배고파도 개안타. 인자부터는 엄마 말 잘 들을게. 엄마, 내 고아원에 가기 싫다. 진짜 엄마하고만 같이 살게해도. 어! 어!”
울면서 매달리는 우리를 보며 어머니는 성경과 찬송가를 꺼냈다. “어쩌면 우리 가족은 이제 천국에서나 다시 만날지 모른다.” 어머니는 짧게 말을 한 뒤 찬송가를 불렀다. 우리도 따라 불렀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하나님이 함께 계셔/간 데마다 보호하며/양식 주시기를 바라네/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예수 앞에 만날 때/다시 만날 때 다시 만날 때/그때까지 계심 바라네.’
나와 동장이는 큰오빠가 빌려온 자전거에 실려 퉁퉁 부은 눈으로 구포로 향했다. 그때 내 나이 열두 살, 동장이는 아홉 살이었다. 구포 애린원은 1938년 한정교 목사님이 설립한 곳이다. 당시 신사참배를 거부해 쫓겨다니던 성도들이 숨어 지내곤 했다. 그곳에서 나는 희야로, 동장이는 장은이로 이름까지 고쳐 불렀다. 주기철 목사님의 첫째 아들 영진 오빠와 셋째 아들 영해 오빠도 함께 생활했다. 주 목사님은 이미 순교한 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나는 내 곁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도대체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이기에 사랑하는 아버지는 감옥으로 가야 하고, 우리는 고아가 되어야 했나. 주기철 목사님은 왜 자식들마저 고아원에 팽개치고 감옥에서 숨졌을까. 어째서 내 부모님은 별난 예수를 믿어 자식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되었나.
우리가 고아원에 있는 동안 큰오빠는 남해 등지의 산 속에 숨어 살며 나무껍질과 산열매, 산나물을 먹으며 지냈다고 한다. 산 속 마을에서 잡일을 도와주며 밥을 얻어먹으면서도 늘 찬송가를 불렀다고 남해 내산의 한덕례씨 집 큰따님이 나중에 내게 얘기해주기도 했다. 어머니도 한덕례씨 집에 잠시 머물렀다.
한번은 애린원에 큰오빠가 찾아왔다. 어디서 구했는지 과자 봉지도 있었다. 새까맣게 탄 얼굴에 몸은 더욱 말라 있었다. 입고 있는 옷도 여기저기 해진 데다 때가 잔뜩 끼었다. 그래도 반갑기만 했다. 그날 밤 오빠가 30명 정도 되는 애린원 고아들 앞에서 성경 말씀을 전했던 기억이 난다. 진주의 나환자들을 찾아간 작은 오빠는 새벽마다 산에 올라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살았다고 한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고아원의 분위기가 이상했다. 한정교 목사님이 나무 그늘 밑에 돗자리를 깔고 사람들을 모아 요란스럽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얼굴이 뭔가 들떠 있는 느낌이었다. 애린원에 들어와서 처음 보는 분위기였다. 한 목사님이 나를 발견하고는 달려오시며 말씀하셨다. “동희야. 이제 너희 남매도 고생이 끝났다. 오늘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단다. 이제 손양원 목사님도 감옥에서 풀려나오실 거야!”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