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노석철] NLL 파문과 검찰총장 원죄론
입력 2013-06-26 17:56
노무현 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누가 봐도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득보다 실이 많은 카드다. 남북관계나 외교적인 신뢰, 해묵은 좌우갈등, 대야 관계 등 어느 쪽을 따져 봐도 득될 게 없어 보인다. 오히려 정권초기 국정안정이 절실한 박 대통령의 발목만 잡는 독이 될 개연성이 크다. 이렇게 뻔한 카드를 여당에서 먼저 꺼내 불을 질렀고, 국가정보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대화록 공개로 기름을 부었다.
여권은 왜 갑자기 대화록 공개란 독배를 스스로 마신 걸까. 도박에 가까운 카드를 쓴 데는 뭔가 곡절이 있을 텐데.
사실 발언록은 한동안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뇌관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서상기 국회 정보위원장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서 위원장은 지난 20일 국정원 고위관계자를 불러 새누리당 소속 정보위원들과 함께 발언록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뭔가에 쫓기듯 오후 늦게 일부 팩트도 틀린 내용을 터트렸다.
이어 4일 뒤인 24일 남재준 국정원장은 야당 의원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발언록 전문을 국회 정보위원들에게 보내버렸다. 그 다음날인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NLL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와 죽음으로 지킨 곳”이라는 발언으로 지원사격을 했다.
일사불란한 여권 물타기 의혹
닷새 사이에 여권 전체가 비밀작전 하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이유는 뭘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물타기’란 의심 외엔 딱 떨어지는 알리바이가 떠오르지 않는다. 국정원 선거개입 의혹 사건으로 박 대통령이 곤혹스러워지자 이를 덮기 위해 파괴력이 엄청난 발언록을 터트렸을 것이란 추론이다.
한발 더 나아가 검찰의 원죄론을 거론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검찰이 국정원 수사를 깔끔하게 마무리했으면 이렇게 릴레이 물타기를 할 이유도, 국정 혼란도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돌이켜 보면 국정원 사건은 애초 호들갑 떨 만한 이슈도 아니었다.
원세훈 전 원장의 과잉충성이 빚은 코미디 정도로 치부될 수도 있었다. 국정원 직원이 댓글 몇 개 쓴다고 대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원 전 원장이 선거개입을 지시했다는 증거도 없었다. 검찰 공소장에 없지만 원 전 원장이 ‘선거 개입으로 오해받을 일은 하지 말라’고 오히려 지시했다는 진술도 나왔다. 따라서 그에게 국정원직원법 위반 혐의만 적용해도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그런데 검찰 내에서 선거법 적용 여부를 놓고 사단이 벌어졌다. 특수통 검사들은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선거법이 되는데 황교안 장관이 왜 그러느냐’며 불만을 터트리고, 공안 쪽에서는 ‘이게 무슨 선거법 사안이냐’고 반박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코미디를 게이트로 만든 검찰
국민들은 당연히 검찰이 또 뭔가 숨기는구나 하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검찰이 사건처리를 보름가량 질질 끄는 사이 ‘국정원이 불법 선거개입으로 박 대통령 당선을 도운 게 아니냐’는 의혹이 정국 이슈로 부각됐다.
우여곡절 끝에 특수통인 채동욱 검찰총장은 박 대통령에게 부담이 되더라도 끝까지 선거법 적용을 관철하는 강단을 보여줬다. 이면에는 지난해 검란(檢亂)으로 만신창이가 된 검찰 위상을 회복하고, 채 총장 취임 후 첫 작품인데 야당에 빌미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우선 검찰 조직이 살고 봐야 한다는 절박함도 있지 않았을까. 그러나 결과적으로 채 총장을 임명한 박 대통령은 대학생들이 시국선언까지 하는 궁지에 몰렸고, 오히려 야권은 큰 선물을 받은 모양새가 됐다. 결국 검찰 수사 때문에 여권은 독이 되더라도 발언록 카드를 쓸 수밖에 없는 외통수에 걸렸다는 게 항간의 물타기 시나리오 요지다. 이런 시나리오가 단순한 추론으로 끝나길 바랄 뿐이다.
노석철 사회부장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