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넘어 함께하는 우리로 (26)] 서울Y 반석 위에 올린 시대의 ‘여걸’
입력 2013-06-26 17:21
YWCA 인물산책 ‘길을 따라서’- 최이권
서울YWCA 회관에는 ‘씨 뿌리는 농부의 모습’이라는 제목의 그림이 걸려 있다. 서울YWCA를 30여 년 동안 열정으로 이끈 최이권이 직접 그린 그림이다. 자신이 그린 그림처럼 최이권은 서울Y에서 씨를 뿌리고 가꾸고 거두는 농부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최이권이 이끌던 30년 동안 서울Y는 재건과 부흥의 기초를 마련하고 여성의 능력을 사회 정의에 실현하며 우리 사회의 변화와 여성의 새로운 삶을 주도했다. 최이권은 1905년 5월 30일 황해도 안악에서 태어나 개성 호수돈여고와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했다. 여고시절 한국YWCA 최초의 하령회에 학생 대표로 참석해 김활란 신의경 신흥우 등 당시 지도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YWCA가 뜻 깊은 일을 많이 하는 곳이라는 신념을 갖게 된 최이권은 당시 정식으로 발족된 학생Y에서 문학부장을 맡으면서 Y에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 해체된 경성여자기독교청년회(서울Y의 옛 이름)를 재건하기 위해 46년 6월 열린 서울Y 총회에서 회장으로 피선된 후 30여년 동안 네 차례에 걸쳐 회장직을 맡으면서 최이권의 지도력은 서울Y 안에서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다녔다.
한국전쟁 중 서울Y가 피난지 부산에서 벌인 우유죽 배급 활동은 당시 대표적인 구호활동으로 꼽힌다. 최이권은 2년 동안 매일 전쟁고아를 위해 우유죽을 배급했고, 학교에 가지 못하는 어린이에게 교육 기회를 주기 위해 공민학교를 열었다.
매월 여죄수를 방문해 기도해 주는 위안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상이군인을 위문하고, 육군병원을 방문하고, 방위군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반공 포로가 수용된 곳을 찾아가 빵과 옷을 보급하고…. 부산에서 서울Y는 전쟁으로 생계와 희망을 잃은 이들에게 아낌없는 도움의 손길을 펼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앞장서서 실천했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최이권이 있었다.
전쟁은 배우자를 잃고 자녀들과 살 길이 막막한 수많은 부인들을 낳았다. 최이권은 재봉클럽을 만들어 구호품으로 받은 옷을 재생하고 구호단체에서 받은 물건으로 제품을 만들도록 이끌었다. 처음에는 현금으로 공임을 지불하지는 못했지만 구호품인 밀가루, 의류, 식용품 등으로 생계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회원들이 만든 제품으로 바자를 열어 수입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재봉클럽은 휴전 후 사업관으로 발전해 남편 잃은 부인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최이권의 활동은 50년대부터 60년대를 거쳐 70년대 초반까지 무궁무진하게 이어졌다. 58년 6월 23일 공사가 시작된 서울YWCA회관은 국제친선향연 등 혼신을 다한 모금활동 덕분에 59년 8월 준공됐다. 수복 후 설치된 Y-틴부를 시작으로 국제친선부 사업부 청년부 성인교육부 회우부 보건체육부 사회부 등의 부서가 신설됐고, 프로그램을 강화하기 위해 61년부터 해마다 프로그램 중점을 정해 시의적절한 주제로 사회 변화에 대응했다. 시골에서 막 올라온 박봉의 직업여성을 수용하는 기숙사 ‘소녀의집’(61년), 회원들의 휴게 공간으로 준공한 ‘식당’(66년), 강당이며 도서실과 응접실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된 4층 강당 ‘묘우당’(71년)까지 시설도 다양하게 확장됐다.
최이권의 활동은 우리 사회의 수많은 ‘첫’ 기록을 남겼다. 66년 12월 시간제 파출부 훈련을 실시해 당시 천시당하던 ‘식모’라는 이름을 ‘가정도우미’로 바꿔 여성의 새로운 직업으로 만들었고, 67년 3월 봉천동 사회봉사관을 개관해 수재민 3000세대에 자활의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근대화와 성평등이라는 시대 흐름을 바로 읽고, 경제적 자립에 대한 여성의 열망을 사회에 전하면서 최이권은 서울Y가 언제나 한발 앞서 사회 변화를 이끌며 나아가도록 열정의 지도력을 발휘했다. 최이권이 아들처럼 아꼈던 김동길 선생은 ‘사랑 반세기’에서 ‘가족을 사랑하고 친구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최이권의 삶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최이권이 회장으로 활동하던 30여년 동안 서울Y는 눈부시게 도약했다. 우리나라에 사회단체가 별로 없던 그 시절, 서울Y가 시작한 모든 사업은 우리 사회의 선구가 되고 모범이 됐다. 서울Y가 언제나 한발 앞서 사회 변화를 주도한 바탕에는 최이권의 열정적인 지도력이 있었다.
뛰어난 언변과 넘치는 창의력, 남성 못지않은 의지력과 과감한 결단력 설득력, 공공선의 추구를 우선 가치로 여기는 자세, 깊고 성숙한 신앙으로 Y의 날개를 안팎에서 크게 펼친 최이권, 그가 남긴 말은 지금도 서울Y가 나아갈 길을 겸손하게 일깨워주고 있다.
“약한 부문에 힘을 기울이는 것이 YWCA의 사명이다.”
차귀숙 (서울YWCA 회장)
◇고 최이권 선생 약력
1905.5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
1930.3 이화여자전문학교 졸업
1946∼50, 53∼62, 65∼67, 69∼73 서울YWCA 5·7·9·11대 회장
1950,59,71 세계YWCA대회 한국대표로 참석
1972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 수상
1988 대한예수교장로회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창립60주년기념 공로표창 수상
1990. 6 소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