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5) 日軍 징집 큰오빠 “죽어도 신사참배는 안할게요”

입력 2013-06-26 17:17


우리 가족이 쫓기듯 떠난 뒤 안토 원장은 나환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아버지에게 설교를 들은 그분들에게 견디기 힘든 고문이었다. 몇몇 환자들이 애양원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몸도 성치 않아 고향의 가족에게도 갈 수 없는 신세였지만, 신사참배를 매일 해야 하는 상황이 더 큰 문제였기에 그러했다.

황덕순 고모를 포함한 7명의 환자들이 애양원을 나왔다. 7명 중 5명이 처녀였다. 황덕순 고모는 25살이었다. 이분들은 무작정 진주로 갔다. 그 무렵 남강 다리 아래에는 100여명의 나환자들이 천막을 치고 걸인 행각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곳의 왕초인 경돌이는 7명의 사정을 듣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환영해 주었다. 평소 애양원 이야기를 듣고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나중에는 왕초부터 시작해 그곳의 나환자들이 모두 함께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고모는 아버지 이야기를 왕초에게 숨김 없이 털어놨다. 왕초는 그 자리에서 거지패들을 불러 모아 손양원 목사 가족을 위해 구걸해온 곡식의 십일조를 떼자고 했다. 그렇게 모은 쌀 위에 된장을 덮어 위장을 한 뒤 황 고모가 머리에 이고 부산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고모는 시시때때로 진주 각설이패들과 애양원에 남아 있던 식구들이 모아 준 곡식을 가지고 우리 집을 찾아왔다. 우리 어린 남매들은 고모만 오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모처럼 흰쌀밥을 먹는 날이었고, 애양원 소식도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는 하늘이 훤히 밝아올 때까지 밤이 새도록 고모와 얘기를 나누었다. 우리도 누워 그 이야기를 들으며 잠을 설쳤다. 고모는 애양원 성가대에서 반주를 했고, 문학적인 재능도 있었다. 성격은 여장부처럼 대쪽같고 뜨거웠다. 훗날 내가 책을 쓸 때에도 많은 자료를 그에게서 받았다. 우리 집안일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분이다.

두 오빠는 부산 나무통 공장에 다니면서도 그곳 직공들에게 전도했다. 우리 집까지 찾아온 직공들과 더운 여름날 집 뒤 동산에 모여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성경을 읽고 예배드리던 일, 성탄절 공장 직공들에게 ‘그 맑고 환한 밤중에’라는 찬송가를 들려주던 일, 모닥불을 피워 놓고 나무토막을 두드려 박자를 맞추던 오빠들의 모습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오빠들은 공장에 다녀와서 틈틈이 책을 읽었고, 우리 동생들에게는 한글을 가르쳐 주었다.

1944년 1월이었다. 일제가 일으킨 전쟁이 아시아 전역을 확대되던 시기였다. 그것이 일제의 마지막 발악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그 무렵 아버지는 청주구금소에 갇혀 있었다. 큰오빠가 처음으로 아버지 면회를 갔다. 당시 오빠의 나이는 19살이었다. 오빠가 면회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오는 기찻간에 경관과 마주쳤다. 그 시절에는 기차에 경관이 꼭 타고 있었다. 경관은 오빠가 어디를 다녀오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오빠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갇힌 아버지를 면회하고 오는 길이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경관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집 주소와 나이, 이름을 물었다. 아무런 두려움이 없던 오빠는 솔직하게 알려주었다.

며칠 뒤 북부산경찰서에서 통지서가 날아왔다. 징병을 위한 신체검사 통지서였다. 군대에 가면 매일 신사참배를 해야 할 터였다. 살아 돌아올 기약이 없다는 일보다 더 두려운 일이었다. 큰오빠는 신체검사에서 갑종을 받았다. 확실한 군입대 예정자가 되었다. 온 가족이 큰오빠를 위해 기도했다. 며칠동안의 금식으로 오빠는 더 수척해졌다. 핼쑥한 얼굴의 오빠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 지는 죽어도 하나님께 불경이 되고 아버님께 불효가 될 신사참배는 할 수 없습니더. 도저히 안됩니더.”

한참 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어머니가 말을 꺼냈다. “알았다. 우리 식구는 이제 흩어져서 숨어 살아야겠다.” 부산 생활에 이제 막 적응하려던 순간에, 우리 가족은 다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