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블루스 ‘붉은 노을’로 타오른다
입력 2013-06-26 17:32
가요계 살아있는 전설 엄인호
서울 서교동 한 카페에서 25일 만난 싱어송라이터 엄인호(61).
1980년대를 풍미한 그룹 신촌블루스를 이끈 인물이자 가요계 살아있는 전설 중 한 명인 그는
최근 몇 년간 쓸쓸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나이가 드니 산다는 것 자체가 진부하게 느껴졌다”는 게 이유였다.
“우울하더라고요.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는 거 같고…. 물론 가끔씩 공연을 열고 무대에 서기도 했죠.
하지만 기분이 달라지진 않더라고요. 내 삶에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야겠단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곡이 써지지 않았다. 2년 전부터 구상해온 새 음반 작업 역시 지지부진했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경기도 고양에 있는 집으로 향하던 지난 3월 어느 날, 노을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다 악상(樂想)을 떠올리게 됐다. 음악을 만든 뒤 그가 붙인 노랫말은 이러하다.
‘부둣가에 앉아 붉은 노을 보며 지나온 세월을 생각하네/ 붉은 노을이 내게 미소 짓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고/ 이제는 나도 알아/ 나도 너처럼 붉게 타오를 걸.’
이날 엄인호를 만난 건 그가 다음 달 발표하는 새 음반 ‘신촌블루스 포에버’(가제)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였다. 앨범엔 그가 노을을 보며 새 출발을 다짐한 신곡 ‘붉은 노을’을 포함해 ‘골목길’ ‘환상’ 등 자신의 히트곡을 새롭게 편곡한 노래 총 20여곡이 담긴다. 앨범 작업엔 1989년 신촌블루스 2집 ‘황혼’ 이후 팀에서 탈퇴한 원년 멤버 이정선(63)도 24년 만에 가세했다.
“저의 진부한 부분들을 모두 없애고 싶었어요. 무엇보다 ‘붉은 노을’에 대한 기대가 크죠. 레게풍의 경쾌한 곡인데 오랜만에 제대로 된 곡을 만든 거 같아요. 저의 야심작이죠(웃음).”
엄인호가 이정선 등과 손잡고 86년 결성한 신촌블루스는 당시까지 우리네 가요에선 유례를 찾기 힘든 끈적끈적한 블루스 선율을 바탕으로 완성도 높은 음악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88년 발표한 1집과 이듬해 내놓은 2집은 지금까지도 당대의 명반으로 회자된다.
신촌블루스는 희대의 가객(歌客)들을 키워낸 요람이기도 했다. 팀을 거쳐 간 가수는 고(故) 김현식을 필두로 이광조(61) 한영애(58) 권인하(54) 이은미(47) 등 10명이 넘는다. 각각 독보적인 음색을 자랑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신촌블루스 음악을 완성시킨 화룡정점이었다.
엄인호는 이번 음반 제작을 앞두고 팀의 화려한 보컬 역사를 이어갈 새로운 인물을 발굴해냈다. 바로 90년대 록그룹 다운타운 등에서 활동한 정선연(40)이 그 주인공이다. 사실상 ‘엄인호 1인 체제’로 유지돼 오던 신촌블루스에 정선연은 최근 객원 멤버가 아닌 ‘정식 멤버’로 합류했다.
“선연이는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후배예요. 하지만 같이 팀을 할 생각은 못했죠. 그런데 알고 보니 집사람이 선연이 팬이더라고요. 예전부터 선연이가 드라마 OST를 많이 불렀거든요. 뒤늦게 선연이 노래를 유심히 들어본 뒤 느꼈죠. ‘아, 내가 찾던 가수가 여기에 있었구나’(웃음).”
이날 인터뷰 자리엔 정선연도 동석했다. 그는 신촌블루스에 합류한 것에 감개무량해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팀의 보컬이었던 역대 선배들을 거론하며 부담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제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김현식 형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신촌블루스를 거쳐 갔잖아요? 그런데 이제 제가 그 집(신촌블루스)에 들어가게 된 거니 부담이 크죠. 과거에 선배들이 노래한 곡을 이제부터 제가 불러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잠이 안 올 때도 있어요.”
음반엔 정선연 외에 박완규(40) 적우(본명 박노희·42) 등 국내 유명 가수들과 이정선이 교수로 재직 중인 서울 동덕여대 공연예술대 학생들이 객원 보컬 신분으로 참여했다. 엄인호는 음반 발매 이후 이들과 함께 전국 투어 콘서트도 계획 중이라고 했다. 그는 “전국을 누비고 싶다. 관객들로부터 ‘(엄인호가 아직) 살아있네’라는 말을 듣고 싶다”며 웃음을 지었다.
특이한 점은 앨범이 LP로도 제작돼 출시된다는 점이다. “저희는 LP의 마지막 세대예요. 음악을 많이 듣는 사람들은 LP의 매력을 알 거예요. CD 소리가 얇고 드라이하다면 LP는 정감(情感) 있는 사운드를 들려주죠. LP로 음악을 듣던 사람은 시대가 바뀌어도 LP의 소리를 잊을 수 없어요.”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