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남호철] 켈로부대
입력 2013-06-26 17:45
1950년 9월 14일 오후 7시. 인천 앞바다에 정박 중이던 기함(旗艦) ‘마운트 매킨리’호에서 더글러스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은 ‘켈로부대’에 북한군 수중에 있던 팔미도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상륙작전을 위해서는 전략적 요충지인 팔미도를 탈환하는 것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켈로부대원들은 주둔지 영흥도를 떠나 칠흑 같은 어둠을 틈 타 팔미도에 잠입했다. 북한군과 치열한 교전 끝에 오전 1시45분 팔미도 등대의 불을 밝혔다. 이어 7개국 7만5000여명의 병력을 실은 261척의 연합군 함대는 등대의 불빛을 길잡이 삼아 영흥도와 무의도 사이 바닷길을 통해 15일 새벽 6시 월미도 해안에 상륙했다. 6·25전쟁의 판도를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는 켈로부대원들의 혁혁한 전공이 뒷받침됐다.
켈로부대의 정식 명칭은 ‘미 극동사령부 주한연락처’(KLO·Korean Liaison Office)이다. 영문 머리글자를 한국말로 발음하면서 ‘켈로’로 불렸다. 1949년 북한 출신으로 조직됐으며 1951년 8240부대로 확대 개편됐다. 주로 적진에 침투해 정찰, 후방 교란, 방해 공작 등 특수임무를 수행했다. 부대원들은 계급도 군번도 없이 활동했기 때문에 ‘얼굴 없는 장병’이나 다름없었다. 약 3만명의 부대원 가운데 6000명이 전사했고 2000명은 행방불명된 것으로 추산된다.
휴전 이듬해인 1954년 켈로부대는 전격 해체됐고 부대원들은 소속도 없이 흩어졌다. 비밀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부대 특성상 성과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1994년까지 참전을 공식 인정받지 못한 비운의 부대였다. 국가 유공자로 선정되지 못하는 설움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최근 켈로부대 관련 기록물이 공개되면서 이들의 활약상이 주목받고 있다. 정전 60주년을 맞아 국가기록원이 6·25전쟁 당시 켈로부대원들이 활약한 사진과 자료를 유엔기록보존소, 미국, 러시아 등에서 입수해 30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그날의 시선으로 본 기록’ 전시회를 열고 있다. 켈로부대원들이 점호를 받고 중공군 복장을 한 채 북한으로 침투하기 직전 모습과 1952년 8월 12일 미군 아이비스 대령의 명령에 의해 켈로부대 부관참모가 부대원들에게 내린 작전명령서 등이 공개됐다. 작전명령서에는 부대원의 명단도 있다.
목숨을 바쳐 국가와 국민을 지켰음에도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하던 용사들이 이런 자료들을 통해 뒤늦게나마 보상받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남호철 논설위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