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최현수] NLL 발언 유감
입력 2013-06-26 17:45
지난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전문이 공개된 25일 한 해군 예비역 제독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북방한계선(NLL)은 피로 지킨 것이 맞다”며 “1, 2차 연평해전에서 소중한 생명들을 잃은 우리에게는 NLL에 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NLL에 대해) 국제법적 근거도 없고 논리적 근거도 분명치 않다고 한 것은 억지”라고 말했다. 또 “NLL 말만 나오면 전부 다 벌 떼처럼 들고 일어나는 것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언급한 것도 가슴 아프다고 했다. 또 다른 군 장성은 노 전 대통령이 “(NLL을) 풀자는 의지를 군사회담에 넣어놓으니까 싸움질만 하고요, 아무리 설명해도 자꾸 딴소리를 하는 겁니다”라고 말한 부분을 읽고 씁쓸했다고 토로했다. 남북군사회담에서 영토수호를 위해 치열한 협상을 벌여온 것이 ‘딴짓’으로 보였다는 자괴감 때문이다.
NLL은 정전협정의 안정적인 관리를 위해 1953년 8월 30일 설정돼 60년간 남북한 간 실질적인 해상경계선 역할을 했다. NLL은 합의된 경계선은 아니다. 51년 7월 10일 시작된 정전협정 논의과정에서 유엔군과 공산측은 연해수역에 대한 이견으로 해상경계선을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자 마크 클라크 당시 유엔군 사령관은 NLL을 설정했다. 서해 5도와 NLL 인근수역은 6·25전쟁 전부터 우리 측 관할이었다. 정전협정이 맺어질 즈음 동·서해 전역은 유엔군이 장악하고 있었고 북한은 해군력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우리군 활동만 제한하면 무력충돌 가능성은 낮았다. NLL은 우리군 북방초계 활동의 한계를 그은 선으로 북한을 보호하기 위한 경계선이었던 셈이다.
해군력의 열세에 꼼짝도 않던 북한은 73년 10∼11월에 43회에 걸쳐 서해 NLL을 침범하는 ‘서해사태’를 일으켰다. NLL무력화 시도의 시작이었다. 남북은 92년 남북기본합의서 및 불가침부속합의서를 맺고 새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지금의 경계선을 지키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북한의 NLL침범은 여전했다. 회의록에 언급된 서해공동어로구역안은 서해 NLL의 긴장완화와 군사적 충돌가능성 방지를 위해 제기됐다. 북한의 행태를 감안하면 실현가능성은 낮다.
정상회담기록 등 주요 외교문서들은 통상 25∼30년이 지나야 공개되지만 공개되지 않는 것도 많다. 지난 2004년 중국은 49년부터 55년까지의 외교문서 3000여건을 비밀해제했다. 건국 이후 50여년 만에 처음 공개되는 자료들인데 6·25전쟁 관련 문서는 제외됐다. 외교부 문서보관소 관계자는 홍콩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외교문서 기밀해제가 중국의 대외관계를 위태롭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비밀해제된 서류들이 기밀문서로 재분류되기도 한다. 2006년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국방정보국(DIA) 등은 국립문서보관소(NARA)에 보관됐다가 비밀해제된 6·25전쟁 관련 서류들을 기밀문서로 재분류했다. 5만5500쪽, 9500건에 달하는 문서가 공개됐다가 일반 서고에서 사라졌다. 반미감정이 일 것을 우려해서다. 미국은 지난 99년 비밀해제됐던 노근리 학살사건 관련 문서들이 한국 등에서 반미감정을 불러왔다고 봤다. 학계와 언론이 “짜낸 치약을 다시 치약 통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짓”이라고 비판했지만 재공개된 분량은 많지 않았다.
‘음험한 비밀주의 문화에 매몰됐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각국이 외교문서 공개에 신중한 것은 공개 시 파장이 커서다. 과거 잘못된 행태에 대해 분명한 책임을 물어야 할 때가 있기는 하다. NLL의 경우 지난 대통령 선거 때부터 논란이 돼 사실 확인이 필요하기는 했다. 그래도 회의록 전체를 공개할 필요는 없었다. 불필요한 추가 논란은 물론 향후 남북관계에 걸림돌이 되거나 외교 문제가 될 수 있는 사안도 있어서다. 국제사회에 국내정치적 상황 때문에 상대국 동의 없이 정상회담 발언록을 공개하는 가벼운 나라라는 이미지를 준 것도 걱정된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