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군은 남침 당한 한국 돕기 위해 온 지원군… 6·25전쟁은 북·미 간 전쟁 아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의 남침이 있자 유엔 안보리는 당일(현지시간) 무력공격을 ‘평화의 파괴’로 규정하고 ‘적대행위의 즉각적 정지’ 및 ‘북한군의 38선에로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 제82호를 채택했다. 북한 측이 이에 불응, 남침을 계속하자 27일에는 전체 유엔 회원국에 대해 ‘무력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에 있어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 제83호를 채택했다.
이에 16개국이 군대파견을, 그 밖의 다수 국가가 기타 원조의 제공을 제의하고 나서자 안보리는 7월 7일 다음과 같은 결의 제84호를 채택하게 된다. 무력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 중인 대한민국을 원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지역에 있어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고자 하는 선행하는 두 결의에 대해 유엔 회원국들이 보낸 지원을 환영한다는 것(제1항), 파견된 군대 및 그 밖의 원조는 미국 주도의 통합지휘부가 이용토록 하고(제3항), 지휘관은 미국이 임명하라는 것(제4항), 통합지휘부는 작전 중 파병국 국기와 유엔기를 함께 사용할 수 있으며(제5항), 미국은 지휘부가 취한 행동을 안보리에 ‘적의(適宜)’ 보고하라는 것(제6항)이 그 내용이다.
안보리 결의 제84호에 의거해 창설된 게 주한 유엔군이고, 이 결의에 따라 미국이 지휘관으로 임명한 이가 맥아더 장군이다. 주한 유엔군의 실체는 안보리 결의 제84호에서 명백한 것처럼 안보리의 권고 결의에 의해 창설된 ‘뜻을 같이하는 나라들의 연합군’(coalition of the willing)이다. 그것을 안보리 보조기관으로 보는 이가 있으나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법적 해석이 가능하지도 않고 유엔이 발행하는 공식 문건인 유엔연감에 안보리 보조기관으로 등재된 적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유엔군이라 불리게 된 것은 창설 당시 개재됐던 유엔의 역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이 명칭은 하나의 관례로 정착돼 유엔의 모든 공식문서에서 사용되고 있고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휴전협정의 명칭도 ‘유엔군 총사령관을 일방으로 하고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의용군 사령관을 다른 일방으로 하는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으로 돼 있다.
주한 유엔군의 임무는 무엇이었던가. 상기 안보리 결의 제84호는 ‘무력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 중인 대한민국을 원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 지역에 있어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 임무임을 밝히고 있다(제1항). 주한 유엔군의 임무는 북한의 무력공격을 받아 자위권 행사를 하고 있는 대한민국을 원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한반도 및 동북아에 있어서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이것은 주한 유엔군의 임무가 집단적 자위권의 행사에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1986년 6월 27일 국제사법재판소는 니카라과 사건에 대한 본안판결에서 집단적 자위권이 행사될 수 있는 요건으로 무력공격이 있을 것, 피공격국에 의한 동 사실의 천명이 있을 것, 피공격국의 원조 요청이 있을 것을 제시했다. 남침이 있은 다음날인 1950년 6월 26일 대한민국 국회가 나라를 대표해 유엔에 원조 요청을 했기 때문에 현재의 국제법에 비춰서도 집단적 자위권의 발동 요건은 충족됐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군과 유엔군과의 관계는 어떠한 것이었다고 봐야 할 것인가. 우리 군과 유엔군은 전혀 별개의 조직이지만 이른바 대전협정에 의해 우리 군이 유엔군 총사령관의 작전지휘권 하에 들어가 있었다. 이것은 전쟁 수행을 위한 편의에서 나온 것일 뿐, 이것으로 해서 전쟁의 본질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6·25전쟁의 본질은 북한의 남침에 대한 대한민국의 자위권 행사였으며 안보리 권고에 의해 창설되고 참전한 유엔군은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온 지원군에 불과했다. 6·25 전쟁을 북·미 간 전쟁이라면서 평화조약에 관한 협상도 북·미 간에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은 견강부회(牽强附會)의 극치이다.
김찬규 국제해양법학회 명예회장
[시사풍향계-김찬규] 주한 유엔군의 실체와 임무
입력 2013-06-26 17: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