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 뒤로한 예술혼 그 기개가 절로…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展

입력 2013-06-25 19:28


“겸재는 금강산을 그리면서 현장이 다른데도 늘 같은 준법으로만 그린다.”

조선 영조 때 진경산수로 이름을 드날렸던 화가 겸재 정선(1676∼1759)을 이처럼 매섭게 비판한 이 선비는 누구일까. 바로 문화 황금기인 18세기 진경시대의 중심에 섰던 문인 화가 표암 강세황(1713∼1791)이다.

그의 삶은 후반생의 힘을 보여준다. 소론 명문가 출신인 그는 노론이 득세하자 출세를 포기하고 32세에 처가인 안산으로 내려간다. 거기에서 심사정 허필 등과 교유하면서 시를 짓고 글씨 쓰고 그림을 그리면서 문인화가로서의 바탕을 만들어 갔다. 그렇게 쌓은 소양은 훗날 정조로부터 ‘시서화 삼절(詩書畵 三絶)’로 평가 받는 초석이 됐다. ‘예원(예술인 사회)의 총수’로도 불렸다.

관운도 뒤늦게 트였다. 61세에 관직에 나가 71세에 한성부판윤(지금의 서울시장)까지 올랐다. 72세에는 청나라 건륭황제 천수연을 맞아 평생 소원했던 청나라 사행을 갔다.

이런 강세황의 삶과 예술세계가 궁금하다면 탄신 300주년을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25일부터 8월 25일까지 두 달간 열리는 ‘표암 강세황,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전에 가보라. 국내외 다양한 장르 유물 100여점이 나와 강세황과 그의 시대를 조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정선의 화명(畵名)까지 우습게 봤던 강세황의 실경산수화가 눈길을 끈다. 송도(지금의 개성) 일대를 여행하고 그린 ‘송도기행첩’, 아들이 부안 현감으로 있던 변산 일대를 여행하고 그린 ‘우금암도(禹金巖圖)’와 다양한 금강산 그림이 있다. 문인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중국 사행 그림을 남겼다. ‘우금암도’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 첫 공개다.

선비화가로서는 드물게 자화상을 남겼다는 점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의식을 유추해볼 수도 있다. 더욱이 자화상은 모자는 관모, 복식은 평상복 차림의 ‘엇박자’여서 관행을 넘는 당당한 문인화가로서의 기개가 느껴진다. 감상록에는 “마음은 산림에 있으면서 조정에 이름을 올렸다”고 적었다.

30여년을 보낸 안산 시절, 여러 화가 및 문인들과의 교유관계와 풍류를 짐작케 하는 그림도 볼 만하다. 복날 개를 잡아먹는 풍습을 그린 ‘현정승집도’가 재미있다. 봉숭아 해당화 등을 그린 청신한 채색화는 별미다.

강세황은 감식안이 뛰어나 화가들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이나 소장한 그림에 그의 화평을 받기를 청했다. 정선, 조영석, 심사정 등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그림에 친필로 남긴 화평에서는 예술적 취향을 공유하는 관계망을 포착할 수 있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