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6일은 ‘크리스천 백범’ 소천 64주기…김구 선생의 신앙은?
입력 2013-06-25 17:45 수정 2013-06-25 21:22
광복후 매일 새벽예배 “경찰서 10개보다 교회 1곳 신설이 더 효과적”
“내가 만일 어떤 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면 이 이상 기쁜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 같이 내가 죽은 후 나 이상의 애국자들이 많이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1949년 봄에 발간된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월간지 활천 230호에 백범 김구(1876∼1949)가 요한복음 12장 24절을 인용해 기고한 글의 일부다. ‘크리스천 백범’은 과연 어떤 신앙인이었을까. 26일 백범 소천 64주기를 맞아 그의 신앙을 조명한다.
백범 전공으로 법학박사(국민대) 학위를 받은 홍원식(51) 박사는 25일 최근 발간한 백범의 일대기를 담은 저서 ‘영웅 백범’에서 “백범은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함께 하나님을 섬겨왔으며, 매일 새벽 예배를 드렸던 크리스천이었다”고 말했다.
백범은 특히 1945년 광복으로 귀국한 뒤 매일 새벽 6시면 자신의 사저인 경교장으로 찾아온 김치선(남대문교회) 목사와 함께 새벽예배를 드렸다. 김 목사가 오전 5시 남대문교회 새벽예배를 마치고나서 일부러 그를 찾아온 것. 그리고 주일에는 백범이 남대문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고 홍 박사는 덧붙였다.
“경찰서 10개보다 교회 1개를 신설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백범이 이 유명한 말을 남긴 장소는 어디였을까. 남대문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 교회 밖에서 기다리던 기자들 앞에서 꺼낸 얘기라고 홍 박사는 전했다.
역사신학을 전공한 이상규 고신대 부총장은 “백범은 당시 교회 목회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지녔던 분이었다”면서 “특히 순교자였던 손양원 목사님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말했다.
백범이 기독교에 귀의한 때는 아버지의 탈상이 끝난 1903년말 쯤. 그때 백범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는데, 친구였던 우종서 전도사의 권유가 계기가 됐다.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 총무로 활동하던 백범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 상동감리교회에서 열린 교회대표자회의에 참석, 을사늑약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그와 가장 가까운 인물들도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최준례)는 물론이고, 백범의 벗이자 ‘멘토’였던 오주경(전 이화여고 교목) 선생도 가까운 신앙의 동지였다.
백범은 여수 애양원을 직접 방문하는 등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1949년 한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백범은 “손양원 목사의 사적을 듣고서 나는 그분의 종교가다운 온정과 자비심에 탄복하고 경의를 표했다.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다”라고 존경을 표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