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김종걸] 한국판 ‘큰 사회론’을 위하여
입력 2013-06-25 18:34
단순히 시장과 정부만 있다면 대다수의 국민들은 불행해진다. 기존의 시장은 소수 주주의 지배에 의해 운영되며, 그들의 이익만을 위해서 움직이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시장의 활력을 증가시킨다고 국민들 모두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를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다. 정부 또한 이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없다. 정부란 ‘국민복지에 복무하는’ 추상적인 그 무엇이 아니다. 구체적으로는 정치인과 공무원의 세계를 말하며 많은 경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해법 중의 하나는 기존의 시장과 정치·관료체계의 외곽에 건강한 시민사회의 거대한 저수지를 만드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이러한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는 곳은 영국 데이비드 캐머런의 보수당 정부일 것이다. 2010년 5월 총선거에서 승리한 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는 정부, 그리고 민간의 시민사회 조직들이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바로 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큰 사회(big society)’ 정책은 이들이 더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있게 하는 것이며, 정부의 엘리트들로부터 길거리의 일반인들에게 가장 크며 획기적인 권력의 이양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즉 전통적인 보수당 정책이었던 ‘시장’의 확대가 아니라 ‘사회(시민사회)’의 확대에 의한 정부기능 축소로 그 정책적 주안점이 변화했던 것이다.
이 정책은 크게 세 가지 핵심내용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지역의 공동체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며, 둘은 공공서비스를 시민사회에 개방하는 것, 셋은 사회행동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지역의 시민사회가 공공서비스의 일부를 대행하게 했으며, 공무원들도 공공서비스조합이라는 형태로 독립시켜 갔다. 자원봉사 영역과 기업의 사회공헌 활동을 강화하기 위한 세법 등의 정책을 정비했으며, 지역시민사회에 대한 교육 또한 강조했다. 가령 영국 각지의 16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지역사회 속의 자신의 역할에 대한 2주간의 합숙훈련이 실시되며 5000명의 지역활동가에 대한 재교육과 활동자금도 제공된다. 중요한 것은 전체 정책을 기안하고 조율하는 조직이다. 이를 위해 총리관저 직속의 제3섹터청을 신설하고 내각부장관(총리비서실장)이 직접 그 조직을 관장하도록 했다.
영국에 비해 한국의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시장은 독점화되어 있으며 경제적 활력은 점차 줄어든다. 정치와 관료체계가 영국보다 효율적으로 보이지도 않으며, 고령화·양극화 속도 또한 빠르다. 시민사회의 경제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협동조합, 사회적기업의 발전도 초보적이며 사회적 기부행위, 정부보조금의 투명성, 개별 시민사회단체의 인적·물적 충실성 모두 한참 부족하다.
정부 차원에서 시민사회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청와대의 시민사회수석실은 되레 없어졌으며, 부처 간 산만하게 퍼져 있는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자활기업, 협동조합 정책들이 청와대 내에서 조율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다. 현 정부의 키워드인 ‘창조경제’ 속에는 아직 단순한 ‘산업입국’의 사고방식이 강하며, 사회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재구성해 경제 활성화에 도움을 줄 것인가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보인다. 또 다른 키워드인 ‘맞춤형 복지’ 속에는 복지전달 체계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방안과 시민사회와의 협치(協治)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발견되지 않는다. 경제와 복지 속에 시민사회의 역량을 어떻게 결합시킬까 하는 큰 그림이 부재하며 시민의 자발성과 능동성을 어떻게 끌어올릴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전이 희박한 것이다.
보수정권의 공통된 어젠다는 ‘작은 정부’에 있다. 그러나 업그레이드된 보수정권은 ‘작은 정부’를 ‘큰 시장’으로 해결하지 않는다. 시대는 ‘큰 시장’이 아니라 ‘큰 사회’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경제’와 ‘맞춤형복지’에 한국판 ‘큰 사회론’을 결합한 새로운 구상, 이를 위한 대대적인 재정비 작업이 필요할 듯하다.
김종걸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