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4) 獄中 아버지 “간수들에게 복음 전하려 항고했다”
입력 2013-06-25 17:29
*아버지는 징역 1년6개월 형을 확정 받고 광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러나 형기 만료일에도 풀려 나오지 못했다. 오히려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이대로 나가면 또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할 것이 틀림없다”는 이유였다. 종신형 소식에 어머니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통곡을 하시며 “이 땅에서 이제 네 아버지를 만날 생각은 마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항고를 했다. 그 이유를 당시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불편이나 고통을 면해 보려는 뜻이 아니라 대구의 간수들에게 성경 교리를 증거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아버지가 연행된 뒤 애양원에는 안토(安藤)라는 일본 원장이 부임했다. 안토는 우리에게 목사 사택을 비우라고 재촉했다. 어차피 있으라고 붙잡아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 원장과 같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애양원 교우들이 안토 몰래 700원의 돈을 쥐어주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위해 광주로 갔다. 광주형무소는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허락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면회도 사치였다. 우선 먹고 살아야 했다. 그 무렵 주기철 목사님의 셋째 아들 주영해 오빠가 부산에서 박신출 집사님(훗날 삼각산 제일기도원 원장)이 경영하는 나무통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두 오빠도 박 집사님 집에서 밥을 먹으며 공장에 다녔다. 한 달 급료가 23원이었다. 오빠들은 그 중 20원을 광주로 보냈다. 그 돈도 남은 가족이 입에 풀칠하기 힘들 정도의 액수였다.
박 집사님은 우리 가족 모두 부산으로 내려오라고 권했다. 우리는 박 집사님이 마련해준 부산 범냇골 산꼭대기 판잣집으로 이사를 했다. 누우면 밤하늘에 별이 보이고, 비가 오면 빗물이 흘러내리고, 여름이면 빈대가 들끓는 그 집이 우리 식구의 보금자리가 됐다. 어머니는 다대포 바다에 나가 미역을 뜯어 머리에 이고 행상을 했다. 해질 무렵이면 행상 다니며 산기슭에서 캐온 쑥이며 냉이를 담아 오셨다.
나는 물을 길어 나르는 일을 맡았다. 큰오빠가 만들어 준 작은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바가지를 물에 동동 띄워 날랐다. 범냇골 판자촌 사람들은 그런 나를 보며 손동희가 아니라 ‘물동이’라고 불렀다. 가끔 지나가는 어른이 내 머리 위에서 그 바가지로 물을 떠마시는 것이 속상했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두고두고 그때 물동이를 이고 다니는 바람에 자라지 못했다며 미안해하셨다.
주일이면 우리 집에 몇몇 교인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신사참배에 동조하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 분들이었다.
어느 날 김길창 목사라는 분이 우리 집을 찾아왔다. 아버지와 한 고향에서 같이 자란 절친한 친구분이었지만, 신사참배를 적극 찬동한 분이었다. 로마서 13장의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는 구절을 강조하고 설교 중에도 “옥중 성도들은 미련하기 짝이 없는 외골수니 그들을 위해서는 기도하지 마라”고 한 사람이다. 그는 별이 훤히 보이는 우리 집을 둘러보더니 어머니에게 흰 봉투를 내밀었다. 어머니는 분노로 몸을 떨며 봉투를 던졌다. “목사님, 우린 그런 돈 아니라도 굶어 죽지 않으니 목사님이나 그 돈으로 잘 잡수시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나를 붙들고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도 왠지 모를 설움에 어머니와 함께 울었다. 무안해진 김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돌아갔다. 김 목사 말고도 범냇골 판자집까지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애양원에서 내가 고모라고 부르며 따랐던 황덕순씨였다. 나환자였던 그분은 놀랍게도 머리에 된장을 이고 왔다. 그 된장 아래에는 쌀이 숨겨져 있었다.
“사모님, 너무 늦게 찾아왔죠. 이 쌀은 진주 남강 다리 밑 각설이패들이 모아준 것이랍니다. 꺼리지 마시고 받아주세요.”
얼굴 한 번 본 적이 없는 진주의 거지들이 어떻게 우리 가족을 돕게 됐을까. 또 애양원 환자인 황덕순 고모는 어떻게 부산 우리 집까지 오게 됐을까.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