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박신한 유해발굴감식단장 “십자가 품고 있던 학도병… 나도 모르게 눈물”
입력 2013-06-25 17:27
6·25전쟁은 한민족에게 너무 큰 시련이었다. 전 국토는 황폐화됐고, 사망자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당시 국군(경찰 포함) 전사·실종자는 16만명을 훨씬 넘어섰다. 아직도 유해 13만여구가 한반도 곳곳에 묻혀 있다. 그만큼 발굴할 유해가 많은 셈이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유해발굴 역사는 아주 짧다. 육군본부가 2000년 4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시작했던 것이다. 2007년 창설된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시간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해발굴사업이 난관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조국의 품으로’ ‘마지막 한 분을 모시는 그날까지’를 부대 모토로 한 유해발굴감식단 박신한(56·대령) 단장을 만나 유해발굴사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해 들어보았다. 박 단장이 해외 출장을 가기 전인 지난 17일 유해발굴감식단 청사에서 인터뷰를 했다.
만난 사람=염성덕 논설위원
-유해발굴 업무를 맡게 된 계기는.
“2005년 말 육군본부 유해발굴과장을 맡고 있었다. 그때 유해발굴감식단 창설을 위한 태스크포스 팀장에 지원했다. 이를 계기로 유해발굴감식단 창설 때부터 지금까지 단장을 맡고 있다.”
-소회가 남다를 텐데.
“지금 생각하면 운명이지 않나 싶다. 군 생활 자체가 국민에게 봉사하는 것이지만 남이 하지 않은 일을 8년간 할 수 있었다. 저한테 국가와 국민이 숭고한 과업을 맡겨주셨다는 보람과 긍지를 갖고 지내고 있다.”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6·25전쟁 때 전사한 형제 가운데 동생 유해를 발굴해 형의 묘역에 안장한 일이다.”
-자세히 설명해 달라.
“1950년 8월 21세 형이 입대했다. 한 달 뒤 홀어머니의 만류를 무릅쓰고 19세 아우도 전선으로 달려갔다. 형제가 각각 소속된 사단은 북진과 후퇴를 거듭하며 사투를 벌였다. 형은 1951년 5월, 동생은 그해 9월 장렬히 전사했다. 형은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지만 동생 유해는 찾을 길이 없었다. 60년의 세월이 흐른 뒤 강원도 양구군 백석산에서 동생 유해를 찾았다.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서울현충원에는 동생을 안장할 묘역이 없었다.”
-동생 유해는 대전현충원에 안장했나.
“60년 만에 죽어서 만난 형제를 또 헤어지게 할 수는 없었다. 국방부에 청원을 했다. 다행히 청원이 받아들여져 형의 묘역에 동생을 함께 안장하고 비석을 2개 세웠다. 2011년 현충일에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동생 유해 안장식에 참석했다. 창군 이래 최대의 예를 갖춰 안장식을 거행한 것이다. ‘호국형제’로 명명된 형 이만우 하사(상병)와 동생 이천우 이등중사(병장)의 사연이다.”
-안타까운 순간도 있었을 텐데.
“2009년 당시 105세였던 김언연 할머니가 외아들의 유해를 찾겠다고 유전자 채취를 신청했다. 김 할머니는 아들이 살아 있으리
라는 실낱같은 기대를 하면서 이사도 가지 않고, 대문 색깔도 바꾸지 않고 아들이 입대할 때의 집에 눌러 살았다. 안타깝게도 유전자를 채취한 그해 겨울 김 할머니가 운명했다. 부모는 먼저 보낸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하는데, 그분도 아들을 60년 이상 가슴에 묻고 사셨을 것이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아들을 직접 찾아가셨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분 생전에 아들 유해를 찾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중국 북한과 유해발굴 문제로 교류한 적은 있나.
“지금까지 북한군 유해 617구, 중공군 유해 385구를 발굴했다. 유해를 발굴할 때마다 유엔사 정전위원회를 통해 중국과 북한에 통지하지만 유해 인수 의사를 전해온 적은 없다. 제네바협약에 따라 경기도 파주에 있는 적군묘지에 임시매장하고 있다.”
-남북이 유해발굴사업에 관해 교류한 적이 없다는 뜻인가.
“남북이 공동 유해발굴에 합의한 적은 있지만 실행되지 않고 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될 경우에 대비해 해마다 남북 공동발굴을 위한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많지는 않지만 남북 협의를 전제로 예산을 마련한 것이다.”
-미국과 협조는 잘 되고 있나.
“물론이다. 한·미 양국이 유해발굴 양해각서를 체결했고 공동 조사·발굴·감식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미국의 도움으로 북한 지역에서 발굴된 국군 전사자 유해가 국내로 봉환된 적도 있다.”
-어떤 봉환 과정을 거쳤는지.
“2000∼2005년 사이 하와이에 있는 미국 합동전쟁포로·실종자확인사령부(JPAC)가 북한에서 아시아 인종으로 보이는 유해 20구를 발굴했다. 한·미 공동 감식 결과 12구가 카투사로 밝혀졌다. 이 가운데 2구는 이갑수 김용수 일병으로 신원이 확인됐다. 이들을 포함해 유해 12구를 JPAC에서 국내로 봉환했다.”
-이들의 유해 봉환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휴전 이후 북한 지역에서 전사한 국군의 첫 번째 봉환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한·미 양국이 혈맹이라는 것을 재확인한 계기도 됐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국가가 반드시 책임진다는 국민적 의지를 보여준 봉환이었다.”
-한국이 미군 유해를 발굴해 인계한 대표적 사례를 든다면.
“로버트 랑웰 소위 등 32명을 태운 소해정(기뢰제거함)이 1950년 10월 경북 축산항 앞바다에서 북한군 기뢰에 부딪혀 침몰했다. 12명은 구조됐으나 랑웰 소위를 비롯한 20명은 실종됐다. 그로부터 58년이 흐른 어느 날, 어로작업을 하다가 그물에 걸린 미군 시신을 야산에 묻었다는 제보가 날아들었다. 우리 발굴팀은 1년 이상 주변을 탐사·발굴한 끝에 랑웰 소위의 유해와 신분증을 찾아서 JPAC에 인도했다. 2010년 7월 미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열린 랑웰 소위 안장식에는 주미대사가 참석했다. 또 국방장관이 랑웰 소위의 유가족에게 위로 서신과 감사의 뜻을 전했다.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해 숨져간 미국 젊은이들의 희생을 한국인들이 결코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미 국민에게 알릴 수 있었다. 우리 유해발굴팀은 지금까지 유엔군 유해 13구를 발굴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책을 내려놓고 총을 잡은 학도병들도 많았다. 이들의 유해를 발굴한 적도 있나.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 지역에서 주민들이 학도병 30명을 매장했다는 제보가 접수됐다. 전사를 살펴보니 급조된 학도병들이 이 지역에서 북한 정규군과 최초로 접전한 기록이 있었다. 발굴한 결과 교복을 입은 학생들의 유해가 나왔다. 전사자들은 베로 만든 탄띠를 두르고 있었는데, 탄띠에는 쓰지 못한 M1 탄창이 9개씩 들어 있었고 나머지 1개는 총에 장전돼 있었다. 당시 1인당 탄창을 10개씩 지급했었다. 탄창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걸로 미뤄 학도병들은 총 한 발 제대로 쏘지 못하고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교복 단추와 만년필 같은 유물도 함께 나왔다. 참 마음이 아팠다.”
-학생을 상대로 유품전시회를 연 적이 있는데.
“학도병들의 출신 학교에 견학을 권유해 3∼4개 학교의 학생회 간부들이 방문했다. 이를 계기로 전국적으로 학교를 순회하면서 유품전시회를 열게 됐다.”
-발굴한 유품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느 것 하나 감동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이분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잘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학도병 발굴현장에서 발견한 십자가가 기억에 남는다. 십자가가 유해 사이에 놓여 있는 위치로 보아 전사자는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국을 향한 학도병의 애국심과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십자가에 의지했을 학도병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해발굴의 가장 큰 어려움을 꼽으라면.
“6·25전쟁 당시 국군(경찰 포함) 전사·실종자 수는 16만2394명이었다. 이 가운데 2만9202명이 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아직도 13만여명의 유해가 이름 모를 산야에 외롭게 남아 있다. 남한 60%, 북한 30%, 비무장지대(DMZ)에 10%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해마다 유해 1000구 이상씩을 발굴하지만 찾아야 할 전체 호국용사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다. 자료가 턱없이 부족해 유해가 묻혀 있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6·25 세대가 고령화됨에 따라 제보와 증언도 줄어들고 있다. 국토 개발에 따른 지형 변화와 전투현장의 훼손도 가속화되고 있다. 2000년부터 지금까지 국군(경찰 포함) 유해 7335구를 발굴했음에도 유가족 품으로 보내드린 유해는 82구에 불과하다.”
-대책은 없는가.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아는 분들, 즉 참전 용사들과 전투를 목격한 주민들의 적극적인 제보와 증언이 필요하다. 또 발굴한 유해의 신원확인을 위해 유가족(전사자의 8촌까지)의 유전자 시료 채취가 절실하다. 유가족이 전국 가까운 보건소를 방문하거나 국번 없이 1577-5625로 연락해서 유전자 샘플을 등록하는 절차를 밟으면 된다. 등록된 샘플은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다.”
-유해발굴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도 많을 것 같다.
“금속탐지기로 탄피, 탄창, 소총, 철모 등 전투 잔해물을 탐색하고 굴토지점을 결정한다. 경험상 150곳을 굴토해야 유해 1구를 찾을 정도로 성공률이 낮다. 대부분의 전투가 고지쟁탈전이었기 때문에 장비를 갖고 산악을 오르내리면서 발굴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장마철과 동절기를 제외하고 평균 8개월 동안 산야를 뒤지고 있다. 기상이변으로 장마철이 길어지고 있는 것도 발굴사업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군과 국민, 유가족에게 하고 싶은 말은.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해를 발굴해 유가족의 품으로 돌려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한 분의 유해를 찾아서 유가족의 피맺힌 한을 풀어드릴 때까지 국가의 무한책임 의지는 계속돼야 한다. 전사자의 유해를 가족의 품, 조국의 품으로 모시는 것은 국민의 참여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정 부서와 군에서만 하는 일이 아니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소중한 책무인 만큼 국민 모두가 참여해야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
염성덕 논설위원 sdyum@kmib.co.kr
박신한 단장은
△1957년 전남 목포 출생 △성균관대 체육교육과 △동국대 행정대학원 △ROTC 18기 임관 △육본 인사운영실 대령보직장교 △9공수여단 참모장 △육군 36사단 107연대장 △육군본부 유해발굴과장 △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