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살기 위해 마을 습격… 가슴엔 늘 가족들 사무쳐”
입력 2013-06-24 18:21 수정 2013-06-24 22:20
빨치산 ‘참회록’ 내용
‘사랑하는 누이야/메마른 농촌에 불을 질러도/잿덩이 들판에 풍년이 드느냐?/꽃이 피어서 떨어지고/녹음이 짙어가는 고향 하늘 아래/너는 두 살을 더 먹었고/자꾸만 부어주는 유리컵에 미련이 남아서/밤이 오면 살인, 강도가 되어야 할/오빠는 산골짝에서/부엉이의 두 눈이 부러웠구나/오빠의 가슴팍에 씌어진 PW의 두 글자가/목이 가늘도록 피리를 불어서 지워지는 날에는/고약한 창포 같은 것은 뽑아버리고/너와 나와 또 다시 꽃씨를 뿌려야겠다’(시, 누이에게)
빨치산에게도 가족은 늘 가슴에 사무쳤다. 이 시를 쓴 이는 1951년 지리산에서 발각됐다. 포로수용소에서 ‘PW(Prisoner of War·전쟁 포로)’가 새겨진 옷을 입은 채 여동생 ‘순이’를 그리워하며 시를 써내려갔다. 그 순간만큼은 여동생과 행복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갔다.
고향에는 꽃이 피고 녹음이 짙어져 갔지만, 그가 자리한 곳의 현실은 잔혹했다. 어둠에 의지하며 살기 위해 닥치는 대로 주워 먹고, 마을로 내려가 부녀자를 협박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자유롭게 밤하늘 누비는 부엉이가 돼 그리던 가족의 얼굴을 실컷 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매일 밤 자신들이 저질렀던 과오에 괴로워하는 시간도 보냈다.
‘철도·도로·전주를 파괴하고 방화하고, 평화스러운 부락민을 위협하거나 기만하면서 식량과 물품을 약탈하였다/나의 부모 형제와 같은 부락민들이 고요히 잠든 심야에 부락을 습격하여 깊은 잠을 깨게 하여/공포에 떨며 어린 아이들이 울고/할머니 어머니들이 나의 손을 붙들며 “이것만은 놔주시오” 하고 애원하는 것을/박절하게 뿌리치고 약탈한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이럴 때마다 내 고향의 부모 형제가 그리웠다’(수필, 참회록 2)
‘어머님 얼굴의 주름살을/어젯밤 꿈에서도 헤어 보았다’(시, 단상)
괴로운 나날이 반복될 때마다 더없이 넓은 가슴으로 죄 많은 아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시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은 깊어져 갔다. 꿈에서도 어머니의 주름살을 셀 정도로 사무치는 그리움에 눈물 흘렸다. 누군가는 이들을 ‘야수’라고 불렀지만, 이들 역시 그리운 고향에 어머니, 누이, 사랑하는 이를 두고 온 평범한 인간이었다.
한국전쟁기념재단이 24일 공개한 ‘지리산 빨치산의 참회록 어머니, 고향 그리고 조국’ 이라는 책에는 이들의 처절한 고백이 담겼다. 이 문집에서 드러난 빨치산들의 소망은 한결같았다. 어서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산봉우리마다/횃불을 올려도/눈보라 거세여/마른 나무 가지를 울리던 밤이면/저 멀리 깜박이는 등불이 그리워/향수는 미칠 듯이 어둠을 뚫었더라’(시, 하나의 염원)
고향에서 뛰어놀던 친구와 적으로 만나야 했던 운명을 원망하며 그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참회도 실렸다.
‘너는 대한민국 국군으로/나는 공산주의 기만에 속아 험악한 산속으로/얄궂은 운명은 우리를 갈래갈래/떼어놓고야 말았다/…(중략)/벗이여, 용서해다오 웅의 죄악을/지금 나는 따스한 대한의 품속에 안기어/뉘우치고 반성하는 수용소에 있다’(시, 너와 나)
이 시를 써내려간 필자는 소학에서 중학, 대학까지 친구와 그림자처럼 붙어 다녔다. ‘죽을 때까지 떨어지지 말자’는 맹세도 했다. 철없던 시절 시냇가에서 뛰어놀며 친구는 빅토르 위고를, 필자는 톨스토이와 트루게네프의 책을 애독했다고 했다. 그러다 이데올로기 논쟁이 붙는 날에는 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며 멱살을 맞잡고 싸웠다. 이내 다시 언덕진 노을 길을 함께 걸으며 우정을 맹세했다. 전쟁과 이데올로기는 그들의 삶을 비극적으로 갈라놨다. 하지만 전향한 이후 필자는 언덕에서 돌팔매 던지며 해맑게 웃던 그날을 회상하며 철없던 시절의 ‘너와 나’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수용소에서 생활하며 빨치산들은 점차 변화를 겪게 된다. 수용소 동쪽 ‘희망의 언덕’ 위에 ‘반성’이란 두 글자로 조성된 잔디 풀이 초록을 자랑하며 자라나는 만큼, 닫힌 마음을 열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느끼게 된 것이다.
‘아 언제나 언제나 가고픈 내 고향/어머님이 창문 열고 기다리는 내 고향/고향에 가는 길은 반성인가 하노라’ (시, 내 고향)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꼈던 인간의 나약함을 고백한 이도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고동치는 심장에 두 손을 대고 “나는 살았다”는 부정할 수 없는 신념에 대한 만족감을 감추지 못한다.’(수필, 참회록)
이 수필의 필자는 ‘비트’ 속에서 생쌀을 먹으며 버텼지만 국군에 포위된 순간 고민에 휩싸였다. ‘싸워서 죽느냐, 손을 드느냐’ 생사에 고민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자신을 ‘혁명가’라고 자칭하며 애국자, 노동당원으로 당당히 활동했지만 막상 죽음의 문턱이 가까워오자 이 신념은 흔들렸다. (북한)당이 질책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아직 청춘의 꽃을 피우지도 못한 인생은 ‘헛되이 죽지 말자’며 그를 붙잡았다. 그는 총을 놓은 채 손을 들었고, 그렇게 포로가 됐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수용소에서 ‘PW’라는 글자가 새겨진 옷을 입고 있는 현재가 행복하다고 털어놨다. 그는 책에서 “공산주의 사상이 불평과 곤궁을 찾아간다. 오늘에 와서야 자유의 민주세계의 위대한 힘을 알았다. 나는 오늘 대한민국 정부의 발전된 정책과 사회상을 보고서야 자유 민주세계의 강대한 힘을 더욱 똑똑히 느낀다”고 했다.
전향 빨치산들은 자신들의 고백을 통해 공산주의의 허구를 고발해 통일의 밑거름이 될 것을 다짐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강산’에서 하나 된 한민족의 미래를 위해 힘을 보태겠다는 지식인의 외침도 엿보였다.
‘통일이여 어서 오라/사랑하는 너를 위해서는/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죽어지려니’(시, 하나의 염원)
‘미약한 저희들이지만 우리들은 여러분이 버리지 못할 귀여운 아들이요 배달민족인 이 몸이 죽어서 이 나라에 도움이 되리라고 인정하시거든 조국의 통일 독립과 항구한 평화를 위해 최후의 피 한 방울까지 바쳐 싸울 수 있는 여러분의 일꾼으로 만들어주실 것을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외치는 바입니다.’(수필, 광명을 찾은 사나이는 힘 있게 부르짖노라)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