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전쟁] 친구·부락민에 총질하던 그들… 눈물로 쓴 참회의 詩
입력 2013-06-24 18:10 수정 2013-06-25 00:41
‘울 밖에 고요히 서서/그리운 옛 사립문 차마 두드리지 못한 채/이 죄지은 자식은 두 무릎을 꿇고 있소이다/따스한 어머님 품속을 차며/야수처럼 산으로 도망간 이 몸/가시덤불이 얽히고 눈보라치는 바위틈을/피투성이가 되어 구르며 헤매도 보았소/(중략)/나의 어머님은 일곱 번 지은 죄를/일흔 번 거듭해도 너그러이 용납하며 다시 품속에 안아주셨다/나의 죄는 태산과 같이 무거워도/어머니 나라 대한은 따뜻하게 나를 포용하리라.’
6·25 전쟁 당시 대한민국을 향해 총부리를 겨눈 ‘빨치산(partisan)’ 중에 전향한 이들은 펜을 들고 참회의 글을 써내려갔다. ‘고향예배’란 제목의 이 시를 쓴 이는 1951년 지리산에서 ‘조선인민유격대’로 활동한 빨치산이었다. 북한 정규군과 별도로 편성돼 밤이면 도시로 내려가서 남한의 통신·교통 수단을 파괴하거나 물자를 빼앗았다. 살인도 일삼았다. 하지만 마음속엔 늘 산 아래 두고 온 어머니가 있었다.
한국전쟁기념재단(이사장 김인규)이 정전 60주년을 맞아 전향한 빨치산의 문집 ‘지리산 빨치산의 참회록’(이지출판사)을 24일 공개했다. 문집에 글이 실린 빨치산 100여명은 지리산 일대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다 광주포로수용소에 수감돼 전향했다. 전쟁이 만들어낸 삶의 벼랑에서 토해낸 이들의 글은 60년 만에 세상에 나왔다.
빨치산들은 산 속 ‘비트’(비밀아지트)에 숨어 지냈다. 험준한 산세만큼 고달팠던 삶은 수필 ‘재생의 길’을 비롯해 문집 곳곳에 배어 있다. ‘해방된 조국’을 위해 함께했던 동료들은 고된 산 생활에 지쳐 하나둘 생과 이별했다. 동료의 죽음을 뒤로 한 채 밤이 되면 굶주린 배를 부여잡고 마을로 내려갔다. 닥치는 대로 음식을 먹어치웠다. 언제 다시 내려올 수 있을지 몰랐기에 소화불량에 신음할 정도로 입에 쑤셔 넣었다. 마을에서 살인이라도 한 날에는 밤공기를 타고 그리운 어머니의 살 냄새가 더 진하게 풍겨왔다. 그런 날이면 밤새 뜬눈으로 남 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이 책에는 빨치산의 생생한 고백과 참회, 전쟁의 기록, 고향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절절히 담겼다. 그들도 고향이 있고 어머니가 눈에 밟혔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선택을 두고두고 후회했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마주친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편저자인 이춘구 KBS 기자는 “우리가 이론적으로 접해온 공산주의의 실상과 당시 빨치산의 모습이 생생한 육성을 통해 처음 공개되는 것”이라며 “그들의 체험이 시와 수필, 산문에 고스란히 되살아나 있다”고 말했다.
김인규 이사장은 “빨치산의 체험을 역사로 기록하고 현대사를 올바르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며 “이들의 고백과 참회를 통해 한국전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김유나 기자 spr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