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이명희] 편지정치
입력 2013-06-24 18:53
편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연인 간에 주고받는 연서(戀書)다. 시인 청마 유치환은 시조시인 이영도에게 20여년간 매일 편지를 보내며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고 노래했다. 젊은 시절 괴테는 7세 연상인 슈타인 부인에게 1500여통의 연서를 보냈다.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느 드 보부아르도 편지를 통해 사랑과 이념을 주고받았다.
편지를 정치에 가장 잘 활용한 인물은 조선시대 정조다. 각종 현안이 있을 때마다 신하들에게 비밀편지를 보내 정치적 현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신하들과 ‘각본’을 짜고 정책을 추진했다.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에게 4년 동안 보낸 299통의 편지가 2009년 세상에 처음 공개됐을 때 상대가 정조의 왕위 등극을 반대한 정적인데다 정순왕후와 함께 ‘정조 독살설’의 주범으로 지목됐던 인물이란 점에서 놀라움이 컸다. 정조는 편지에서 상소를 올리라고 부추기는가 하면 때로는 강하게 밀어붙이고, 때로는 부드럽게 회유하며 국정을 자기 뜻대로 펼쳤던 노회한 군주의 리더십을 드러냈다.
덩샤오핑(登小平)의 개혁·개방정책의 충실한 집행자였던 중국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도 중요한 고비마다 편지를 보내 덩의 의사를 묻고, 덩의 뜻에 따라 정책을 집행했다. 1989년 천안문(天安門) 사태 당시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반대하다 숙청당해 16년간 가택연금생활을 할 때는 덩과 여러 원로 지도자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보내 자신의 억울함과 자유 회복을 호소했다.
소설가 출신인 민주당 김한길 대표가 오늘 박근혜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편지에서 “잠들지 못하다가 박차고 일어나 새벽에 몇 자 적는다. 국민의 분노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대통령의 침묵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는 격한 표현을 쏟아냈다. 그러면서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 의혹사건과 관련한 국정조사 즉각 실시를 수용하라고 대통령의 결단을 촉구했다. 박 대통령은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는 말로 비켜갔다.
정국이 어지럽거나 군주가 그릇된 정책을 행하려 할 때 예부터 신하들은 상소를 올려 왕에게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정적의 편지를 ‘흠집 내기’ ‘발목 잡기’라고 무시할 게 아니라 쓴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옛 속담에도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다는 말이 있다.
이명희 논설위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