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3) “우상숭배 안된다” 신사참배 거부 5년간 옥고
입력 2013-06-24 17:29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열린 예수교장로회 총회에는 일본 경관 97명이 총회장에 들어왔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의식이니 기독교인도 참여한다’고 결의해 버렸다. 신사참배에 응한 목사들이 모두 비양심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감옥까지 가셨던 배 모 목사님은 부인이 “당신 고집 때문에 자식들과 나는 죽게 된다”며 애걸복걸하는 바람에 의지를 꺾기도 했다. 그런 분들이 많았다. 슬픈 일이었다.
참배를 거부한 분들도 2000여명이나 된다. 일제는 온갖 고문을 했고, 200여개의 교회를 폐쇄했다. 순교자는 50여명이나 됐다. 애양원 교회가 소속된 순천노회도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아버지처럼 여기에 반대한 분들이 노회에서 분리해 나와 순천선교회를 결성했다. 그나마 애양원 교회는 다른 곳보다 박해를 덜 받았다. 나환자 수용소라는 특성 때문에 어느 정도 눈감아 준 것도 있었다. 세상이 천대하는 나병이 신앙을 지켜주는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던 셈이다.
아버지는 그러나 애양원 안에서 조용히 신앙을 지키는 데에 머물지 않았다. 애양원 교회에서는 물론이고 다른 교회에서도 설교를 할 때면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라고 역설했다.
“성경 말씀에 분명히 ‘하나님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내 앞에서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한 나라의 임금 명령도 거역할 수 없을진대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찌 거역하겠습니까? 일본이 만든 신사의 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신의 형상을 만들어 놓았으니 분명한 우상입니다. 참배해서는 안 됩니다. 세계 역사를 보면 우상 숭배하는 나라는 망합니다. 예수 잘 믿는 민족은 축복을 받습니다. 우리가 어찌 나라 망하는 일을 하겠습니까.”
이런 아버지를 일본 경찰이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그날은 1940년 9월 25일 수요일이었다. 2명의 남자가 바쁜 걸음으로 우리 집에 들어왔다. 다짜고짜 아버지를 찾았다. “손 전도사 집에 있나.”
어머니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뉘신지요.”
“우리는 손 전도사를 연행하러 온 여수경찰서 형사다!” 그때 아버지는 애양원 교회에서 당회를 하고 있었다. “지금은 아니 계시오.”
형사는 마루에 걸터앉았다. 아버지에게 집에 오지 말고 숨으라고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얼마 뒤 아버지가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두 형사는 아버지를 낚아채더니 밖으로 끌고 갔다. 아버지는 이미 각오를 한 듯 조용히 그들을 따라나섰다. 어머니에게 “걱정 말고 기도나 해 주구려”라는 말만 남겼을 뿐이다.
이 짧은 말을 던지고 떠난 아버지는 그날부터 해방될 때까지 5년을 갇혀 있었다. 아버지의 죄목은 신사참배 거부와 선동이었다. 나는 식사기도를 할 때마다 “아버지가 빨리 풀려나게 해주세요. 아버지가 빨리 집에 돌아오게 해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어머니는 다른 걱정을 하셨다. 그 무렵 신사참배를 거부했다가 경찰서에 끌려간 분들 중에 곤욕을 치른 뒤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서약을 하고 풀려난 목사님들도 계셨다. 혹시나 아버지도 그런 일을 겪지 않을까 생각하셨다. 아버지가 붙잡혀 간 지 열 달쯤 지났을 때였다. 어머니는 아버지 소식을 수소문했다. 마침 며칠 뒤 재판을 마치고 여수경찰서를 떠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머니는 젖먹이 동생을 업고 나와 오빠들까지 데리고 여수행 기차를 탔다. 여수경찰서 앞에서 무작정 기다렸다. 나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다시 만날지 모른다는 기대감에 설레었다. “저기 아버지가 오신다.” 큰오빠가 먼저 소리쳤다. 머리를 파르라니 깎은 아버지의 모습은 기대와 달랐다. 어머니는 내 손을 이끌고 얼른 아버지 곁으로 다가갔다. 성경을 펴들고는 아버지에게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계시록 2장 10절 말씀 아시죠? 신사참배에 응하면 내 남편이 아닙니다. 영혼 구원도 못 받습니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