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방우체국-루마니아 정홍기 선교사] 목회자로, 때로는 해결사로… 자유찾은 교회와 20년 동행
입력 2013-06-23 17:26 수정 2013-06-23 17:28
열방우체국이 새로운 필진으로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루마니아와 인도 등 4개국 선교사들의 희로애락이 담긴 ‘복음 열전’을 통해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체조요정’ 나디아 코마네치를 기억하십니까.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에 출전해 무려 6종목에서 10점 만점을 따내며 당시 최고의 영웅으로 떠올랐던 선수였지요. 아직까지도 세인들에게 회자되고 있는 코마네치는 어느 나라 출신일까요. 바로 이곳 루마니아입니다.
한반도 면적의 1.1배인 루마니아는 발칸반도 북부 흑해 서안에 위치해 있습니다. 장엄한 산들과 비옥한 농토들로 둘러싸인, 유럽의 최대 농토보유국이자 금, 은, 동, 구리와 철 등이 적지 않게 묻혀 있는 자원국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동구 유럽에서 가장 삼엄한 공산체제를 경험한, 아픈 역사를 지닌 나라이기도 합니다. 오랜 독재정치 아래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했습니다. 몬트리올에서 3개, 모스크바에서 2개의 금메달을 땄던 국민영웅 코마네치도 호의호식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궁핍한 생활 속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루마니아는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폭정에 휘둘리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갑갑한 정치적 상황이 루마니아인들에게는 도리어 복음을 갈망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루마니아는 동방정교회가 약 87%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5%, 그리고 개신교는 8% 정도입니다. 2200만명에 달하는 전체 인구 가운데 개신교 인구가 176만명 정도입니다. 개신교의 경우 공산주의 통치기간 예배행위 자체가 금지된 적은 없었다고 합니다. 다만 목사들의 설교가 감시받거나 활동이 제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배나 집회 자체는 허락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신앙을 유지하게 만든 원천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마니아에서는 1989년 12월 루마니아 혁명 이후 많은 교회들이 개척되고 몇몇 신학교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도처에 교회 지도자가 부족한 현실입니다. 침례교회와 오순절 교회 등이 복음적인 교회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지만, 문서와 찬양 분야를 비롯해 교회 개척과 성도 양육을 위한 선교사들의 도움도 절실합니다.
저와 아내인 이명자(59) 선교사는 루마니아 수도인 부쿠레슈티와 대학 도시인 클루즈, 티미소아라 등지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개척한 시온장로교회에서 21년째 목회를 이어가고 있는데, 많은 부분을 현지인에게 이양했습니다. 10년 전쯤부터는 매주 화요일 국회기도회와 함께 상원의원이 된 동역자 목사를 돕고 있습니다.
선교 사역지를 루마니아로 정하게 된 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1990년 3월 독일과 스위스 교회를 방문하던 중 유럽 교회의 영적 실상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간직해온 진리에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스위스에서 머물던 어느 날, 현지 신학교 한 교수의 권유로 1989년 12월에 있었던 루마니아의 민주화 혁명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스위스 기독교 방송국이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를 서유럽에 알리기 위해 제작한 것이었습니다. 억압을 받고 있던 교회들의 활동을 담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때 그 교수가 나에게 건넨 한마디는 마음을 쿵쿵 뛰게 만들었습니다.
“정 목사님, 지금 루마니아에는 두 가지가 필요합니다. 붕괴된 사회의 재건을 위한 영적, 정치적 지도자가 절실합니다. 또 하나는 자유를 찾은 교회에 성경이 필요합니다. 한국교회가 루마니아의 선교에 적극 나서주면 좋겠는데….”
1990년 8월, 스위스 정부의 도움으로 내가 몸담고 있는 AFC선교회는 루마니아 현지에 단기 선교팀을 파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 부부는 단 하나뿐인 아들(당시 8세)이 병으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습니다(훗날 아들의 죽음은 우리의 루마니아 사역에 순교적 바탕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초창기 교회개척 방식은 거의 동일합니다. 현지인을 가정에 초대해 음식을 대접하면서 성경을 공부하는 패턴입니다. 그중에서도 함께 음식을 나누는 식사는 빼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배를 드린 뒤 음식을 함께 나누고 설거지까지 마치면 비로소 모임이 끝납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친 루마니아인들은 설거지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음식 먹기가 바쁘게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화장실이 급해 집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또한 부탁을 하지 않으면 자발적으로 봉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머지않아 알게 되었습니다.
사역 초창기 때에는 교회 비품이 사라지는 것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했습니다. 교회에 비치한 화장지나 비누, 수건 등 보이는 것은 무엇이든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한번은 교회 바닥에 카펫을 깔고 신발을 벗게 했는데, 누군가 신발 5켤레를 훔쳐가기도 했습니다.
선교사들이 겪는 시행착오는 또 다른 선생님, ‘반면교사’입니다. 특히 음식을 함께 나누고 사람들의 어려운 생활을 주저 없이 도와주는 선교사들의 활동은 대가를 치르게 만들기도 합니다. 선교사를 자칫 자신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해결사로 간주하게 만들 뿐 아니라 도움을 거절당하면 교회를 나오지 않는 나쁜 습성을 갖게 한 것입니다. 하지만 멈출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집에 샤워시설이 없는 이들에게는 우리 집이 목욕탕이요, 먹을 게 없으면 친절한 식당이 되어줘야 했습니다.
교회 사역을 하면서 약 10년 전부터는 현지 지도자 양성을 위해 기도하고 준비했습니다.
2004년부터는 ‘기독교와 사회’를 주제로 매년 세미나를 갖고 있습니다. 지금은 전국적인 세미나와 작은 모임 등을 통해 통합적 지도자를 찾는 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국회 조찬기도회와 대학의 세미나 발표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루마니아 사회 지도층을 대상으로 사역의 범위를 점점 넓혀가는 중입니다.
다른 나라도 비슷한 부분이 있겠지만 루마니아도 사회 각 분야의 크리스천 리더들이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복음의 물줄기가 아래로 좌우로 흘러내릴 것입니다. 이제 조금씩 열매를 맺으려고 합니다. 이 사역 또한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시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국민일보 연재를 시작하면서 다시 한번 루마니아에 도착한 첫날이 떠올랐습니다.
꼭 20년 전인 1993년 6월 1일 자정쯤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억수같이 퍼붓는 빗줄기를 헤치고 수도 부쿠레슈티에 도착했습니다. 본격적인 현지 사역을 위해 이사를 온 것입니다. 모기와 싸우며 밤새 이삿짐을 집으로 옮기고 나서 새벽 3시쯤 도착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주신 말씀이 마태복음 4장 16절이었습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우리를 이곳 루마니아로 인도해주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깨닫게 만드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 그 감격과 선교에 대한 열정, 부르심을 향한 순종의 마음을 되새기며 루마니아인의 영혼 구원 열전은 오늘도 이어집니다.
루마니아 정홍기 선교사
●정홍기 선교사
-1954년 전북 고창 출생
-1985년 웨스터민스터신학대학원대 졸업
-AFC선교회 간사(1986∼1991)
-1992년 AFC선교회 루마니아 선교사로 파송
-루마니아 시온장로교회 목사(1992년∼현재)
-루마니아 전문인 지도자 개발원 대표(2010∼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