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웅 목사의 시편] 기다림
입력 2013-06-23 17:13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장기려 박사는 6·25전쟁 당시 피란통에 가족들과 생이별을 경험했던 분이다. 1·4 후퇴 당시 자신이 돌보던 환자들을 정신없이 트럭에 태우고 내려오다 보니 그만 아내와 4남매를 북에 두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는 남한에서 40년 이상을 혼자 살면서 아내를 그리워했다고 한다. 주위에서 재혼하시라는 권유를 받을 때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내 아내에 대한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재혼하지 않습니다. 그를 다시 만날 터인데 왜 재혼을 합니까? 아내도 오늘까지 참사랑을 간직한 채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만약 살아서 아내를 보지 못해도, 우리의 사랑은 저 천국에서 영원할 것입니다. 그래서 재혼하지 않습니다.”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의 마음이 너무도 애절하다. 아내를 기다리는 그의 순백한 사랑을 보며, 마음에 떠오르는 명제가 이것이다. ‘사랑은 기다림이다.’ 사랑의 진정성은 반드시 ‘기다림’으로 표현된다. 왜 그럴까?
기다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기다림’이란 일단 상대방의 시간에 나를 맞추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시간과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고 고집하는 자에게 ‘기다림’이란 일단 불가능하다. 상대방의 시간이 기준이 되어 거기에 나를 맞추어야만 ‘기다림’은 가능하다. 내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시간만큼은 내가 중심이 아니라 그가 중심이 된다. 내 시간이 기준이 아니라 그의 시간이 기준이 된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그가 주인이 된다. 이것이 ‘기다림’이다. 이것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다림’의 시간이 지속되면 그 속에는 짜증과 분노가 쌓이고 폭발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자아가 죽어지고 중심이동이 된 상태에서 ‘기다림’의 시간이란 짜증과 분노가 아닌 사랑과 순종을 만들어 내는 시간이다. 기다림의 본질을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본질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이 무엇인가? 중심이동이다. 주인 교체다. 기준의 변화다. 그러므로 신앙과 기다림의 본질은 똑같다. 결국 ‘기다림’은 사랑의 본질이고, 신앙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주어진 ‘기다림의 시간’은 결코 애매하게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그것을 낭비되는 시간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결혼을 기다리고, 진로가 결정되길 기다리며, 병상에서 회복을 기다리면서 자신이 마치 벤치를 지키고 있는 후보 선수처럼 낙오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다림’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은 바로 그 시간이야말로 자신의 신앙과 삶이 평가되는 가장 중요한 순간, 테스트 시간임을 모르고 있다. 예선전보다 더 중요한 본선전이 바로 기다림의 시간 동안 치러지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오랜 시간 병상에서 투병하는 성도들이 생각난다. 그들에게 지금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당신은 지금 가장 중요한 순간을 보내고 있어요. 당신의 인생 점수가 몇 점인지, 바로 지금 결정되고 있으니까요!’
<서울 내수동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