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정종미] 편리와 불편
입력 2013-06-23 18:41
그림 그리기 전 나는 재료 준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주로 자연재료를 쓰다 보니 가공에 많은 시간과 품이 든다. 예를 들면 가루상태의 안료를 교와 섞어 물감을 만들거나 미리 교를 팽창시켜 해리시키고, 콩을 불려 갈아서 콩 즙을 만든다든가 하는 등의 일이다. 이런 과정은 일이 많고 매우 번거롭다. 그러나 주위 화가들의 하소연을 들어보니 자연재를 선택한 것이 참으로 다행이다. 합성재를 쓰는 대부분의 화가가 건강상의 문제나 불편을 호소하기 때문이다.
액상묵으론 수묵화의 감동 못내
아크릴이나 유화 등의 튜브 물감은 기계문명의 소산으로서 산업혁명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화가들은 이전보다 편리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더욱이 인상파라는 미술 사조는 이것을 사용하여 미술사의 일대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전에는 화가들이 안료를 직접 채취하고 제조해야 했기 때문에 야외 작업이 불가능했으나 휴대가 가능한 튜브 물감 덕분에 화가들은 화실을 박차고 태양 아래로 나갈 수 있었고 빛에 의한 색채를 맘껏 향유했다. 그렇지만 튜브 물감 회화는 정크 푸드인 햄버거처럼 영양가를 상실해 버리고 말았다. 전통회화에서 드러나는 색채 표현의 변화무쌍과 다채로움을 튜브는 담아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묵화의 주재료는 먹이다. 그러나 요즘엔 수묵작가 중에도 액상묵을 쓰는 화가를 많이 보게 된다. 이것은 폐타이어 등을 태워 얻은 저급 탄소알갱이를 합성아크릴수지와 섞어 놓은 것이다. 예로부터 동양화가들이 사용해 오던 먹은 식물성 기름을 태워 얻은 고급의 탄소알갱이를 소가죽을 삶아서 얻은 고급 교와 섞은 것으로 여기에다 온갖 귀중한 한약재를 넣고 수천 번을 찧고 빻아서 먹빛에 깊이와 아름다움을 부여한 것이다. 이 먹을 벼루에 갈아서 그리면 농담(濃淡)의 천변만화가 일어나니 여기에서 수묵의 진정한 감동이 비롯되는 것이다. 액상묵은 절대로 이러한 농담의 변화를 내지 못한다. 액상묵으로 그린 그림은 수묵화가 아니고 단지 흑백화일 뿐이다.
한국화가들 중에는 아크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선 한국화라 칭하는 이들이 있다. 통상 한국화라고 하면 좁은 의미로는 전통회화의 맥을 잇는 그림을 뜻한다. 회화의 장르는 사용되는 전색제(미디엄)의 종류에 의해 정해지는데 기름을 쓰면 유화가 되고 아라비아 검을 쓰면 수채나 과슈가 된다. 난황은 템페라, 밀랍은 크레용이 된다. 한국화의 전색제는 교이고 아크릴의 전색제는 합성수지이니 전혀 별개의 것이다. 아크릴로 그린 그림은 ‘아크릴화’라고 명해야 한다. 이것을 한국화라 명하는 것은 기본적인 지식의 결여라고 본다. 아크릴을 쓰면 경제성과 편리성을 얻게 될지는 몰라도 전통 채색이 드러내는 미학적, 보존적 우수성은 상실하게 된다.
자연과의 동화가 삶의 질 높여
불편하고 비경제적이라는 이유로 합성염색보다 폄하됐던 천연염색은 그 색상의 은근함과 아름다움으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전통가옥인 한옥 또한 웰빙과 친환경 바람을 타고 최근의 건축 트렌드에 한몫 하고 있다. 아파트 공간은 편리하긴 하지만 정작 공간적 한계에 삶을 빼앗겨버리게 되는데 반해 한옥은 나무와 흙으로 되어 있어 사람을 순화시키고 덕을 키워준다.
한민족은 수천년을 한반도에서 살아왔고 가장 적합한 삶의 형태로 진화해 왔다. 늘 자연과 동화되기를 갈망하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민족이다. 최근 일이백년 사이 ‘가난극복’을 핑계로 잠시 ‘자연 상실’을 선택했지만 우리의 DNA 속에는 여전히 자연에 대한 동경과 연민이 남아 있다. 이제 우리를 포함한 모두를 이롭게 하는 것,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대해 성찰해야 할 것이다. 거시적 안목으로 보면 그것이 가장 경제적이고 편리한 삶이자 가장 유익한 삶이기 때문이다.
정종미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