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동희 (2) 나환자 상처 아물지 않자 입으로 피고름 빼내
입력 2013-06-23 17:03
다행히도 아버지와 함께 애양원에 계셨던 김수남 권사님께서 방송에 출연해 그때 일을 얘기해 주셨다.
“목사님은 우리 나환자들을 가족처럼 대해주셨다. 목사님의 자녀들까지 우리와 거리낌 없이 어울렸다. 목사님 대접한다고 우리가 기른 시금치를 뽑아다 씻어 된장에 무쳐 드리면 ‘너희 반찬 참 맛있다’ 그러시면서 그렇게 맛있게 잡수시고…. 당시 부산서 온 박옥순이라는 나환자가 다리에 상처가 났다. 좀처럼 낫질 않았다. 손 목사님이 그걸 아시고는 치료하겠다고 입으로 그 상처를 빠셨다. 옛날에는 환자 상처를 빨면 낫는다는 그런 통설이 있었던 모양이다. 목사님 같은 분은 정말 없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서야 사람들의 이야기가 과장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나도 시간이 지나면서 애양원에 익숙해지고 내 또래 환자들과 친구로 지냈다. 하모니카를 멋지게 불던 내 친구 태수는 1991년 11월 22일 ‘손양원 목사 기념관 착공식 예배’에서 다시 만나 정말 기뻤다.
내 기억 속에 아버지는 항상 바쁘셨다. 주일은 애양원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시고,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보통 다른 곳에서 사경회를 인도하셨다. 불러주는 곳이 있으면 천리길도 마다하지 않고 가셨다. 집회가 없을 때에도 집에 머무를 겨를이 없었다. 늘 애양원의 나환자들을 돌아보셨다. 그 때문인지 내게 아버지에 관한 살가운 기억이 많지는 않다.
아버지는 카리스마 있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누구나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분, 어린이들도 달려와 매달릴 수 있는 분이셨다.
막상 맏딸인 나는 아버지와 정들 겨를이 없었다. 교회 일도 바쁘셨지만, 내가 여덟살 때 아버지가 신사참배 거부로 감옥에 가신데다, 나중에는 내가 오빠들과 자취를 했기 때문에 자주 뵙지 못했다.
이 글을 정리하다보니 떠오르는 기억이, 언젠가 방학 때였던 것 같다. 내가 집에 와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아버지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다. 아버지의 따뜻한 손과 간절한 기도 소리에 우리를 향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그렇게 늘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셨던 모습 덕분에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여덟살이 되었을 때였다. 친구들은 다들 보통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나는 집에만 있었다. 학교에 가면 신사참배를 해야 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예 보내질 않았다.
사실 일제가 처음부터 신사참배를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신사를 만들어 놓고 ‘동방요배’라며 권하기만 했다. 그러나 미국과 전쟁을 벌이고 동원 체제가 되면서 점점 신사참배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오빠들도 그 무렵에 학교에서 쫓겨났다. 그런 상황이라 나는 아예 학교를 보내질 않았던 것이다. 나는 너무나 학교가 가고 싶었다.
“엄마, 나는 왜 학교에 안 보내주는 거야. 나도 보내줘.”
“동희야, 그건 안 된다. 학교에 가면 신사참배를 시키는데, 그건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행동이야.”
어머니에게 아무리 졸라도 답은 늘 같았다. 그 무렵에 아버지에게 크게 혼났던 기억도 난다. 한번 울면 울음을 그치지 않는 성격이어서 아버지에게 한 대 맞기까지 했던 기억도 난다.
한번은 가방 멘 아이들 뒤를 졸졸 따라갔다. 아이들은 나를 놔두고 교실로 쏙 들어가 버렸다. 나는 차마 교실까진 따라가지 못 하고 운동장을 서성거렸다. 쉬는 시간에 나온 아이들은 나를 거지 취급하고 같이 놀지도 않았다. 서러우면서도 나는 학교를 떠나지 못했다.
‘도대체 저기 교실 안에서는 무얼 배우는 걸까.’
살금살금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발꿈치를 삐죽 들어 유리창 안으로 교실을 들어다 봤다. 흑판 앞에 서 있던 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 선생님이 나왔다.
“너 학생도 아니면서 여기서 뭐하는 거야. 저리 가지 못해?”
선생님은 발을 번쩍 들어 나를 걷어찼다.
정리=김지방 기자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