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스포츠 심판] 심판 위에 팬… 잘해도 ‘욕먹는’ 직업
입력 2013-06-22 04:04
퀴즈 하나. 프로 스포츠 심판들은 왜 검은색 옷을 입을까? 정답은 심판복이 법관의 법복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그라운드의 판관’인 심판은 법관만큼 고독한 직업이다. 프로야구 심판은 운이 없으면 공에 맞아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프로축구 심판은 경기 때마다 평균 12㎞나 뛰어다녀야 한다. 심판은 열 번 잘 보다가도 단 한 번 잘못 보면 상대 팀은 물론 언론과 팬들로부터 뭇매를 맞는다. 심판을 하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반드시 필요하지만 누구에게서도 따뜻한 대접을 못 받는 것이 그들의 운명이다.
그라운드의 고독한 포청천
심판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정확히 감별해야 한다. 스트라이크냐 볼이냐, 세이프냐 아웃이냐가 결정되기 때문에, 잘못 눈을 깜빡거리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 벌어진다. 판정에 조금이라도 불만이 생기면 코칭스태프와 선수, 팬들은 심판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때로는 150㎞가 넘는 강속구에 맞아 그라운드에 쓰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없이는 경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심판들이 공에 집중할 때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한다. 강속구, 이리저리 휘는 변화구가 3차원 스트라이크존을 통과하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시력은 물론이고 공간 지각력도 뛰어나야 한다. 특히 구심은 포수 뒤에 서서 서너 시간 동안 100개 이상의 투구를 지켜봐야 하기 때문에 집중력이 남달라야 한다. 절대 음감도 필수다. 방망이가 공에 스쳤는지, 헛돌았는지는 미세한 소리로 판단한다. 특히 주자가 1루를 밟을 때, 공이 글러브에 박히는 ‘퍽’ 하는 소리에 1루심의 청각과 시각이 복합적으로 반응한다.
심판들은 찰나의 순간, 애매한 상황에 올바른 판정을 내려야 한다. 명백하게 편이 나뉜 스포츠에서 심판은 어떤 판정을 내려도 어느 편에게는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심판원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소리 없이 끝나는 경기가 최고라고 말이다. 누가 심판을 봤는지 모르게 그냥 지나가기를 바란다. 하지만 경기는 늘 이기고 지는 법이다. 이유야 어찌 됐든 그들은 욕을 먹게 돼 있다. 심판이 잘한 판정은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는다. 그런데 오심은 기가 막히게 살아 움직이며 심판원의 멱살을 잡는다.
왜 그랬을까
지난 15일 잠실구장에서 열렸던 넥센과 LG전에서 일어난 2루심 박근영(40) 심판의 판정은 누가 봐도 ‘명명백백한 오심’이었다. 오심을 하기 어려운 오심이었다. 시야가 가린 것도 아니었다. 1루 주자 오지환이 2루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넥센 2루수 김민성이 분명히 공을 잡은 것이 TV 중계 화면이나 여러 매체의 사진에 잡혔다. 확실한 아웃인데도, 박근영 심판은 ‘세이프’를 선언했다. 조종규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위원장과 양해영 KBO 사무총장이 넥센 더그아웃을 찾아 염경엽 감독에게 사과의 손을 내밀었다.
이튿날 오후 3시30분. 물의를 일으킨 주인공을 만나러 잠실구장으로 향했지만 그는 2군으로 내려가고 없었다. 그 자리엔 전날 포항구장에서 심판을 봤던 2군 소속 이계성 심판원이 대신 올라왔다. 이날 이계성 심판원은 김병주(3루심) 팀장, 이영재(구심), 권영철(1루심), 원현식(2루심) 심판원과 한 조로 편성돼 대기심을 맡았다.
4시가 되자 양 팀 출전선수들의 명단이 전달됐다. 5명의 심판원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전날 경기에 대해 물었지만 심판원들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이윽고 4시55분. 마지막 용변을 마친 네 남자는 관중의 함성이 포효하는 그라운드 안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소리없이 끝나는 경기가 최고”
초등학교 3학년 아들과 유치원 다니는 6살 딸이 있다는 이계성 심판원은 경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일부 팬들이 주장하고 있는 ‘져주기 아니냐’는 말에 대해 정색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똑같은 직장인입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딸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100억을 현금으로 준다고 해도 가족과 바꿀 순 없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받을 생각이 있으면 당연히 옷을 벗어야죠. 프로야구에 그런 심판은 없습니다.”
어느새 경기는 5회말이 끝나고 클리닝 타임이 됐다. 2시간이 넘는 경기시간 동안 중간에 쉬는 타임은 딱 4분이었다. 참았던 소변을 보고, 진통제도 먹고, 급한 전화도 하고 담배 한 모금도 이 짧은 시간에 다 소화했다. 이날 경기는 3시간여 만에 LG가 경기 초반 득점을 끝까지 지켜 5대 4로 승리를 거뒀다. LG는 주말 3연전을 싹쓸이하며 파죽의 5연승을 달렸다. 반면 넥센은 최근 잇단 음주 파문 등으로 어수선한 상태에서 충격적인 7연패를 당했다.
“축하합니다.” 승리한 LG 감독에게 한 말이 아니다. 이계성 대기심이 경기를 무사히 끝내고 들어오는 선배 심판원들에게 한 말이다. 경기가 잘 끝나서 다행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이다.
그제서야 웃음을 되찾은 심판원들은 성인 서너 명도 제대로 다리를 뻗을 수 없을 정도의 비좁은 탈의실에서 심판복을 벗고 옆에 달린 샤워장에서 이미 지나 버린 판정의 순간을 깨끗하게 씻고 또 씻었다. 이날 3루심을 맡은 김병주 팀장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리 없이 끝나는 경기가 최고입니다. 누가 심판을 봤는지 모르게 그냥 지나가는 것 말이죠. 경기는 이기고 지는 것 아닙니까. 이유야 어찌됐든 우리는 욕을 먹게 돼 있습니다. 심판이 잘한 판정은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심은 기가 막히게 집어내니까요.”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