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천재 음악가 정추] 파란만장 삶 ‘조선의 차이콥스키’

입력 2013-06-22 04:04


남한 국민 23년… 북한 인민 13년… 무국적자 17년… 옛 소련 공민 16년

가수 주현미의 노래만 들으면 가슴이 시렸다는 천재 작곡가 정추(90). 카자흐스탄에서 고국을 그리던 선생은 지난 13일 옛 수도 알마티 시내의 식당으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가던 중 사망했다. ‘검은머리 차이콥스키’라고 불리던 정추의 음악은 카자흐 교과서에만 60여곡이 실렸다. 그는 러시아 음악 사전에 차이콥스키(1840∼1893)의 4대 제자로 기록돼 있다.

음악적 업적은 찬란했지만 그는 평생 망명자였다. 정추의 인생은 한국사의 질곡과 그대로 닮아 있다. 일제 말기인 1940년대부터 23년은 남한 국민, 13년은 북한 인민, 17년은 무국적자, 16년은 옛 소련 공민으로 살았다. 그는 늘 자신의 인생에서 이상을 좇았다. 이상이 좌절될 때 또다시 국경을 넘어야 했다. 그는 늘 망명자, 이방인, 경계인이었다. 남한과 북한 모두에서 잊혀지거나 환영받지 못했다. 월북 행위와 김일성 우상화에 반대해 북한에서 쫓겨난 이력은 꼬리표처럼 달렸다.

1944년 니혼대 음악학과를 졸업한 그는 2년 뒤 형인 정춘재 영화감독을 따라 월북했다. 평양음악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그는 1953년 당시 사회주의 종주국이면서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러시아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다. 차이콥스키음대 졸업 작품인 ‘내 조국’으로 유례없이 심사위원 만점을 받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고 옛 소련이 세계 최초 유인 우주선을 발사할 당시 축하 음악회에 초대받아 한국 서정이 가득한 ‘뗏목의 노래’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1957년 모스크바에서 벌인 김일성 우상화 반대시위 때문에 그의 인생은 다시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당시 그는 사회주의자였지만 개인숭배, 비밀경찰 제도, 극단적 언론 통제가 횡행한 스탈린주의는 옳지 않다고 여겼다. 1953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하고 니키타 흐루시초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에선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김일성 우상화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모스크바 유학생 사이에서 폭넓게 확산했다. 그는 운동을 주도했다. 북한 당국은 그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958년 무국적자가 된다. 북한 당국은 소련 정부에 정추의 송환을 요구했으나 소련은 대신 지금의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유배를 보냈다. 옛 소련은 17년 후에야 그에게 공민증을 발급했다.

조국은 그를 내쳤지만 정추의 음악 300여곡엔 민족혼이 서려 있다. 그는 1958년부터 녹음기를 메고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가요와 민요를 채록했다. 당시 6㎏ 무게의 녹음기를 든 중년의 정추는 고려인들이 밀집한 카라탈, 타퀴켄트, 크즐오르다 등에 자리한 집단농장이나 국영기업소를 헤매며 1000여곡을 채록했다.

“9월 26일 아침 나는 알마아따 자동차정류소에서 바까나스행 차를 탔다. 무거운 녹음기를 걸머진 나의 차림새는 먼 길을 떠나는 지질 탐사대원이나 고고학자를 연상시킨다. 그들이 지층을 읽으며 광석도 찾고 땅 속에 묻혀버린 유물을 찾아낸다면 나는 심금을 울리는 세기의 목소리를 더듬어 사라져가는 인민음악을 발굴 보존하자는 것이다.

나는 여러 생각에 잠겨 시간의 흐름을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어느새 차는 일리강 역에 자리 잡은 까리가치 촌을 훨씬 지났고 새로운 주택들이 오른편에 보이기 시작했다. 1년 동안에 벌써 백여 호나 들어선 이곳이 바로 ‘박빡띄’란 새마을이다. 박빡띄는 카자흐 말로 민들레 벌이라는 뜻이다… 벼 가을 준비가 분망한 때임에도 불구하고 김학룡 동무는 그날 저녁에 김블라지마르 동무네 집에서 노래 잘하는 사람을 모아 놓았다. ‘새파란 풀밭에 이슬은 반짝이고…’ 고운 목소리로 김웨라가 ‘양치는 처녀’를 불렀다.”

그는 1968년 6월 18일 ‘녹음기를 메고서 조선 민요를 찾아서’라는 글에서 민요 탐사 여행을 이렇게 기록했다. 채보한 음악을 ‘소련의 고려가요’라는 이름으로 집대성해 세상에 내놓았고 스탈린에 의한 고려인 강제이주의 슬픈 역사를 담은 교향곡 ‘1937년 9월 11일 스탈린’을 작곡했다. 5악장으로 구성된 곡은 ‘삼엄한 명령, 낙망, 모국 추억, 울분, 슬픈 울음’이라는 각각의 제목을 악장마다 갖고 있다.

그의 음악적 열정은 늘 식지 않았다. 정추는 카자흐 국립여자대학에 음악학부를 설립하고 카자흐 민요를 합창곡과 피아노 연주곡으로 편곡해 음악 교과서에 수록하는 등 공훈예술인 칭호를 수여받았다. 카자흐의 음악 평론가 표트르 아라빈은 “풍부하고 깊이 있는 한국 음악을 소개하고 한민족의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이곳에서 새로운 음악 세계를 창조해냈다”고 정추의 작품을 평한다.

그는 가끔 한국 땅을 밟았다. 2011년 12월 17일 모교인 서울 양정고가 주최한 양정음악제에 참석한 당시 한 일간지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훗날 내가 세상에 없더라도 작곡했던 ‘내 조국’이 통일된 조국의 애국가로 불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 그는 2013년 6월 13일 타국에서 사망했고, 통일은 여태 오지 않았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