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현의 사막의 구도자들] 독방
입력 2013-06-21 17:26
대여섯 평 되는 오피스텔에서 거의 갇혀 지내다시피 한 게 4개월째이다. 강의가 없는 날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방안에 틀어박혀 있는 게 상례다. 송내초등학교 산보나 솔안 공원의 산책 정도가 유일한 외출의 시간. 나무와 꽃, 새와 풀을 대면하는 시간은 늘 싱그럽다. 굳었던 근육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생기가 돋고, 나비의 날갯짓이며 경쾌한 새들의 종알거림, 신록의 푸르름 덕에 마음도 함께 명랑하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은혜로우신 주님, 감사합니다.”
기도와 독방
몇몇 지인은 이런 나의 삶을 놓고 홀아비라고 농담을 주기도 하고 혼자 힘들지 않냐고 염려해 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잘 모르는 건, 홀로 지내는 독방도 나름 묘미가 있다는 것이다. 혼자 사는 맛의 백미는 ‘고요와 침묵’이다. 말을 걸어주는 사람도 말을 들어주는 사람도 없다. 그 흔한 TV도 내겐 없고 싱크대에 부착된 라디오는 주파수가 잘 안 맞아 거의 안 튼다. 전화마저 안 오면 꼼짝없이 하루 종일 벙어리 비슷하다. 일주일에 수업 없는 며칠은 이렇게 벙어리처럼 산다. 독방의 맛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말없이 지내는 것, 말을 떠나 말을 잊고 지내는 것 말이다.
언어는 의사소통, 즉 자아를 드러내어 서로 통하기 위한 발명품이다. 그래서 소통이 빠르고 많아야 하는 문명사회는 신개념, 신조어가 넘쳐난다. 그런데 소통이 필요치 않는 독방에선 언어가 멈추고 개념이 사라진다. 지구가 자전을 멈추고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는 듯하다. 이런 고독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집요한 환영처럼 내게 따라붙는다. ‘나는 무얼 하며 살고 있나,’ ‘나는 누구인가,’ ‘오! 주님,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이제 세 돌이 지난 막내부터 초등학생 아들, 청소년인 딸아이까지 세 아이의 아빠로 그들과 함께 살 때는 이런 질문으로 깊숙이 내려갈 기회가 많지 않았다. 코에서 단내가 나도록 뛰고, 수족을 부지런히 놀려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러나 누구든, 언어가 멈추고 세상이 멈춘 고독의 장소에서 몇 주만 갇혀보시라. 내가 받았던 그런 질문이 집요하게 따라다니며 끈질기게 대답을 추궁하고 기도로 이끌고 들어갈 테니까. 이것이 독방의 장점이다. 언어를 잃는 대가로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것, 박탈이 큰 만큼 얻는 것도 크다.
오피스텔의 내 독방이든 감옥의 독방이든 본래는 같은 종류의 독방이었다. 인류 역사에서 감옥에 독방이 만들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감옥의 독방은 18세기 말 펜실베이니아 퀘이커 교도들의 작품이다. 퀘이커 교도들은 죄수를 때리거나 죽이는 것이 무익하고 잔인하다고 생각했다(앤서니 스토 저, ‘고독의 위로’에서 참조). 그래서 수도원의 독방을 모방해, 타인과 격리돼 고요히 성경을 읽으며 뉘우칠 수 있는 감옥의 독방을 고안해 냈다.
하지만 현대 감옥의 안락한(?) 독방이 아니더라도, 옛 감옥에서 하나님을 깊이 체험한 경우도 있다. 고대의 마지막 철학자로 불리는 기독교인 보에티우스는 고트족 왕 테오도리쿠스의 감옥에서 유명한 ‘철학의 위안’을 집필했다. 종교개혁 시대의 토머스 모어도 기독교 지혜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시련과 위안’을 옥중에서 집필했다. 존 버니언은 ‘천로역정’의 대부분을 12년의 투옥기간에 썼다. 외부세계와의 단절은 고통스럽지만, 그런 단절 속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에 들어가고 고통의 꽃인 영서(靈書)가 탄생한 것이다. 독방에서의 언어 박탈뿐 아니라, 청력이나 시력의 상실 등 감각의 박탈도 지적인 산파 역할을 한다. 베토벤은 청력을 잃은 뒤에 피아노에 의존할 수가 없었고 이 때문에 피아노의 기교가 배제된 ‘합창교향곡’ 같은 불후의 명작을 남길 수 있었다.
안토니오스는 사막 기독교인들에게 오직 하나의 싸움만이 남아 있다고 했다.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는 사막의 독방, 남아 있는 게 있다면 마음에 남아 있는 기억의 잔상이다. 기독교인들이 사막에 들어간 것은 기억 속에 녹아 영혼을 괴롭히는 욕(欲)의 찌꺼기를 제거해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고자 함이었다. 고요와 적막이 지배하는 사막의 독방에 홀로 있노라면 세상의 소리가 희미해지고 육의 갈증조차 줄어든다. 만약 독방을 벗어나고 싶은 유혹이 불 일듯 일어난다면? 사막의 원로들은, 무엇이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하더라도, 독방만큼은 떠나지 말라고 가르쳤다.
사막의 독방, 감옥의 독방
사막의 독방이나 감옥의 독방에 비하면 가전제품이 그득한 내 오피스텔 단칸방은 너무 사치스럽다. 내게 있는 자유 또한 사치여서 난 언제든지 원하기만 하면 바깥바람을 쐬면서 보기도 누리기도 한다. 그런 독방을 뒤로 하고, 방학을 맞아 연구 겸 몬트리올에 살고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온 지 이틀째다. 지난 4개월 동안 언어를 박탈당한 채 고요 속에서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면, 이제 방학 두 달은 가족을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들어주고 이야기를 나눌 때이다. 언어가 있든 없든 늘 그리스도 예수께서 동행해 주시길 기도드린다.
(한영신학대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