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조용래] 보이지 않는 가족

입력 2013-06-20 18:44

식구(食口)는 한 집에서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이들이다. 민중신학자 안병무 교수는 ‘민중신학이야기’(1987)에서 한자 뜻을 들어 ‘신께 바친 음식을 함께 나눠먹는 모임을 식구’라고 봤다. ‘회사식구’, ‘사무실식구’ 등은 함께 먹는다는 점을 중시한 비유다.

반면 가족은 주로 부부를 중심으로 한 친족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혼인이나 입양은 물론 대가족, 핵가족 등을 다 포함한다. 가족이 혈연 중심이라서 ‘회사가족’이니 ‘가족 같은 회사’ 등의 말은 좀 억지스럽다.

영어로는 가족이든 식구든 둘 다 ‘family’라고 쓴다. 식구란 의미는 우리의 고유성이다. 그만큼 우리는 함께 나눠먹는 것을 중시했다. 그런데 산업화와 더불어 식구와 가족은 협소한 개념이 됐다. 대가족에서 소가족, 핵가족으로 심지어 1인 가족으로 쪼개지는 상황에서 함께 나눠먹는다는 뜻의 식구는 그저 가족의 다른 이름으로만 자리 잡고 있을 뿐이다.

요즘엔 고령화 바람과 함께 가족의 개념도 새롭게 바뀌고 있다. 일본의 노무라총합연구소(NRI)는 ‘2015년 일본-새로운 개국의 시대로’(2007)란 보고서에서 ‘보이지 않는 가족(invisible family)’의 탄생을 말했다. 65세 이상 인구 비율인 고령화율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일본의 경제·사회적 변화에 관한 내용이다.

NRI는 ‘보이지 않는 가족’을 ‘같이 살지는 않지만 경제·정신적으로 서로 의지하는 가족’으로 정의한다. 눈앞에 보이지는 않지만 걸어서 오갈 수 있는 거리(近居·근거), 대중교통으로 1시간 이내(隣居·인거)에 사는 부모형제라는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경우 전체 가구 중 근거·인거 비율은 1997년 28%에서 2006년 41%로 늘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친가·처가의 부모와 한 집에 살기에는 내외가 서로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지만 근처에 살면서 가끔씩 필요할 때 자녀 돌보기를 맡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큰 의지가 될 것이라는 전제다. 연로한 부모 입장에서도 자녀 가족과의 동거가 부담일 수 있으나 가까운 곳에 살고 있으니 신변에 갑작스러운 변고가 생기더라도 손쉽게 자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 안심이라는 얘기다.

나에게도 이런 변화는 시작됐다. 지난해 9월 장인이 별세한 후 홀로 남은 장모는 서울 근교의 전원생활을 접고 딸·아들 사는 곳 근처로 옮겨왔다. ‘근거(近居)’다. 우리는 한 집 ‘식구’로 모시고 싶었으나 독립심 강한 어른의 주장을 받아들인 게 그 배경이었다. ‘보이지 않는 가족’이 고령사회를 대비한 또 하나의 지혜일 수 있겠다.

조용래 논설위원 choy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