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희성] 지바의 아침

입력 2013-06-20 18:42 수정 2013-06-20 09:48


“행복한 시간들을 간직하라. 그대가 늙은 후에 안락한 쿠션이 될 것이다.” 아침에 카카오톡으로 받아본 웹툰 끝자락에 나온 말이다. 삽화 속에는 커다란 쿠션에 폭 파묻혀 쉬고 있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시원하게 웃는 모습에 덩달아 긴장이 풀렸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전히 쉼표. 평온함이다.

내게도 그런 포근한 추억이 있다. 8년 전 이맘때 일본에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지바로 갔다. 아무 준비 없이 시작된 일본 생활은 하루하루가 텅 빈 느낌이었다. 마음 붙일 곳이 필요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엉뚱하게도 영어 학원. 주 3일, 집 앞의 역에서 전철을 타고 도쿄로 향했다.

고3 수험생마냥 새벽부터 학원 갈 준비로 정신없던 첫날. 씻고 나와 보니 아버지께서 아침을 준비하고 계셨다. 식빵을 구워 딸기잼을 바르고 계란과 햄을 넣은 샌드위치. 외국인 동료에게 배웠다는 아버지표 초스피드 샌드위치는 달콤하고 짭짤하고 고소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본 특별함, 아버지의 손맛이었다.

그렇게 행복한 아침을 먹고 씩씩하게 집을 나왔건만 직장인들의 출근 행렬에 끼어드니 백수라는 자격지심과 외국인이라는 괜한 이질감에 시작부터 피곤이 몰려왔다. 어깨가 움츠러들고 다리에서 기운이 쏙 빠지는 듯한 느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집 쪽을 봤다. 순간 울컥했다. 아버지가 서 계셨다. 딸내미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드는 아버지의 손길에 위로를 받았고 힘을 얻었다. 그날 아버지는 내가 탄 전철이 역을 떠날 때까지 그렇게 지켜보고 계셨다.

얼마 전 셋째를 갖게 된 친구가 있다. 좋은 유치원과 영어캠프에도 보내야 하니 돈을 더 많이 벌어야겠다고 한다. 부업이라도 할 기세다. 소설 ‘소금’의 박범신 작가가 말하는 자식에게 빨대 꽂힌 슬픈 아버지의 모습. 아이를 특별하게 키우고픈 마음은 이해하지만 버거워하는 친구가 안쓰러웠다. 좋은 아버지라는 굴레에 갇혀 희생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그가 아이와 함께 행복한 아버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장 가까이서 특별한 시간과 행복을 주고받는 사람들, 그게 부모고 가족이 아닐까. 그렇게 쌓인 시간들이 상처받은 마음을 달래줄 연고가 되고 가족의 삶이 깨지지 않게 감싸 주는 것이다. 평범한 하루의 특별한 기억은 그 기억을 품은 사람까지 특별하게 해준다. 지금 아이들에게는 아버지의 돈보다 아버지의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 나의 8년 전, ‘지바의 아침’처럼.

김희성 (일본어 통역사)